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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Aug 31. 2024

계곡의 추억

6산 연인산 (2018년 8월)

거의 50년 전이다. 어렸을 때 날이 좋은 일요일이면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작고 낡은 차를 타고 청평이나 가평으로 물놀이를 갔다. 하얀 조약돌이 깔린 얕은 강에서 물놀이하고 나오면 엄마가 평소에 잘 주지 않던 라면을 끓여주었다. 야외에서 먹는 라면은 예나 지금이나 특별하게 맛있다. 아버지는 빨갛게 그슬리도록 온종일 햇볕을 받으며 강에서 릴낚시를 했다. 하지만 재빠른 물고기는 거의 잡히지 않았다. 어쩌다 피라미 같은 물고기를 잡아 들어 올리면서 아버지는 월척을 한 것처럼 크게 웃었다. 서툰 낚시꾼에게 잡힌 물고기는 은빛으로 반짝여 가짜 미끼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아주 시골이었던 마을은 어중간하게 개발되어 혼잡하고 어수선했다. 그러나 산으로 깊숙하게 들어오자 숲은 울창하고 강물이 옛날처럼 맑고 힘 있게 흘렀다.

더워서 꾀가 났는지 계곡에서 물놀이하고 싶은 친구들과 등산을 원하는 친구들이 나뉘었다. 나는 물놀이에 매우 끌렸지만, 산의 맛을 알아버린지라 등산을 택했다. 봉우리가 1,000m 이상이고, 산세가 유려하며, 계곡에 사시사철 물이 넘쳐흐르는 이 산은 이름이 없었다. 그저 ‘우목봉’이나 ‘월출봉’이라고 불리다가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달달한 의미를 담은 ‘연인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북한산은 바위가 많은 골산(骨山)이고 연인산은 흙으로 된 육산(肉山) 혹은 흙산이라고 했다.

올라갈 때는 잎이 무성한 나무로 이룬 터널이 무자비한 햇살을 막아 맨살에 닿는 공기가 산뜻했다. 길거리에 줄지어 달리던 차 안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산은 한적했다. 등산길은 여름 내내 뿌린 햇살과 비로 초목이 제멋대로 자라서 대장은 앞장서서 길을 만드느라 키가 큰 풀을 헤치고 나갔다. 장수봉에서부터 이어진 장수 능선을 따라가는데 잎이 털북숭이처럼 매달린 나무가 가려서 옆의 능선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잣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 자라 빽빽한 숲을 이룬 곳도 있었다.

연인산 정상(1,068m)에서는 사방으로 산맥이 첩첩이 이어져 끝이 없었다. 산행의 클라이맥스인 꼭대기에서 한참 풍경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계곡에서 기다리는 친구들과 합류해야 해서 사진만 찍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용추계곡으로 향한 하산 길은 좁고 거칠었다. 정상을 기대하며 오르는 길과 달리 하산은 목표를 이룬 후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어 더 힘들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걷고, 미끄러지지 않게 한 발 한 발 어디에 디딜까 생각하다 보면 발걸음이 잰 앞서가는 산꾼들과 멀어져 적막한 산에 홀로 남는다. 그때 나는 무섭기보다는 달콤한 절대 고독에 사로잡힌다. 느닷없이 찾아온 인간의 기척에 놀라 새도 벌레도 숨죽이고 있는 숲 속에서의 짧은 순간, 자연과 나 사이의 경계는 사라진다.

하행 길에도 수목이 우거져서 선두에 선 친구들이 길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다 길을 잘못 들어 ‘알바’(계획한 경로를 벗어나 길을 헤맸다)를 했다. 모두 좀 당황했지만, 대장이 길을 다시 찾아가다가 신기루처럼 로맨틱한 나무와 벤치를 만났다. 우정이 애정으로 변한다는 연인산의 마법이 실현되는 곳일까. 우리는 길을 헤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선물처럼 나타난 풍경을 떠나기가 아쉬워 사진을 찍으면서 ’알바‘를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용추계곡이 길동무가 되었다. 물이 흐르는 암석에는 나무의 나이테 같은 줄무늬가 예술작품처럼 그려져 있었다. 투명한 푸른색의 물이 뽀얀 편마암을 애무하듯 스치고 지나가면 명쾌한 물소리가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산 거리가 10km가 넘어 지칠 때쯤 물에 발을 담가 곤함을 풀었다. 한여름의 가장 뜨거운 시간이 살짝 지났고, 찬물이 열기를 식혀 우리는 다시 먼 길을 내려올 힘을 얻었다. 기암괴석 사이로 깊고 빠르게 흐르는 계곡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나도록 아찔했다. 아래쪽 계곡에서는 청년들이 어린아이들처럼 놀고 있었다. 그들의 요란스러운 웃음과 여름 같은 젊음이 부러웠다. 하지만 오늘 우리도 가장 젊고 발랄한 때가 아닌가.

계곡팀 친구들은 예상보다 늦게 내려온다고 걱정하다가 우리를 보더니 살아 돌아와 다행이라고 반가워했다. 계곡물에서 신나게 놀았던 친구들의 얼굴이 물에 씻겨 말끔했다.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했던 풍경을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그냥 웃었다. 물놀이하며 놀았던 그들과 길을 잃기도 하며 긴 산행을 하다 잠시 탁족(託足)했던 우리는 식당에서 맥주를 함께 마시면서 계곡에 흐르던 차고 시원한 계곡물을 같이 떠올렸다. 물은 흘러 가지만, 나의 반백 년 전 추억처럼 오늘 하루도 기적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아, 계곡의 추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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