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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Sep 20. 2024

운 좋은 날

9산 예봉산 눈꽃산행 (2018년 11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눈 산행은 처음이라 위험하지 않을까 망설였다. 그러나 어렵게 잡은 날이고 오후에는 그친다고 해서 준비물을 단단히 챙겨 나섰다. 산행지는 남양주시의 예봉산이었다. 경의 중앙선 열차 창밖으로 자꾸만 굵은 눈이 쏟아졌다.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드는 풍경을 따뜻한 좌석에서 바라보면서 내리지 않고 쭉 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운길사 역에 내려 아이젠을 신발에 차고, 비옷을 입고, 두꺼운 장갑을 끼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함박눈은 옛날 새색시 발걸음처럼 사뿐사뿐 내렸다. 우리는 고운 눈을 맞으며 괜스레 설렜다. 밤새 내렸고 아직도 내리는 눈으로 산은 하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쪼그라든 주황색 감 위에도, 헐벗은 나뭇가지 위에도, 지저분한 쓰레기 위로도 눈은 세상의 더러움과 삭막함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삭막했던 겨울 나라는 눈이 부시게 하얗게 빛났다. 

등산로 초입 도로에 쌓인 눈은 벌써 다 치워 차가 다녔다. 눈 오자마자 큰길을 말끔하게 만들어 주는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이다. 10 년 전 미국에 살 때 눈이 많이 와도 집 앞 도로는 차가 다닐 수 있게 해놓은 모습을 보고 이 나라는 잘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미국에서도 큰 도로는 눈을 치워주지만, 주택 앞 골목은 각자 치워야 했다. 현관문이 열리지 않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임시로 학교 문을 닫은 겨울날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어 늦잠을 자던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남편과 힘을 합해 삽으로 눈을 치워 나가는 길을 냈다. 사춘기 열병을 앓던 아들들은 틀에 갇히기를 끔찍하게 싫어했고, 가끔 사고를 쳤다. 나는 쟤들을 두고 지금 죽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까지 하고 살았는데, 눈을 치우는 애들을 2층 창에서 바라보니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내 품속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훌쩍 큰 아이들이 대견하면서도 곧 닥칠 이별을 상상하니 쓸쓸했다. 

눈을 무겁게 지고 있는 나무가 하얀 터널이 되고 본격적인 등산로는 눈이 덮어 사라졌다. 등산로가 잘 보이지 않는 눈길에 처음 발길을 내디뎌 길을 만드는 사람을 '러셀'이라고 한다. 우리는 러셀인 대장 친구가 밟는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면서 산을 올랐다. 무거운 아이젠이 안정감이 있어 미끄러지지 않았다.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나서 듣기 좋았다. 눈이 그치자 회색빛 하늘 아래 하얀 세상은 더욱 하얗게 반짝였다. 등산객이 많지 않고, 들짐승도 저마다의 집에서 설경을 감상하는지 산속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방금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적갑산과 예봉산 정상을 차례로 오르고 능선을 따라 걸었다. 설산은 우리의 감각을 부드럽게 자극했다. 눈(眼)이 닿는 곳마다, 숨을 쉴 때마다, 장갑 속으로 눈송이가 들어갈 때마다 겨울의 정취가 절절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노란 노을이 퍼지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내려왔다. 거의 16km였다. 

산 밑에는 기온이 올라 햇볕이 비추는 곳에는 눈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눈으로 길이 사라진 산을 헤치고 정상에 올랐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눈이 많이 왔던 것일까. 무거운 아이젠을 신고 만만치 않은 거리를 걸어서 체력 소모가 많았지만, 눈의 세계가 신비하고 황홀하여 힘든지도 몰랐다. 눈이 많이 온다고 걱정했는데 장비를 잘 갖추고 러셀을 맡을 친구가 있어서 안전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 눈이 오는 겨울에도 산에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아니 순수한 설경을 보기에 산만큼 적당한 곳은 없다. 걱정으로 시작한 날이었는데 사실 운이 좋은 날이었다.      


*눈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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