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aireyoonlee Sep 27. 2024

보물을 지키는 산

10산 가야산(2018년 12월)

우리나라의 귀한 보물 대장경을 모신 해인사. 이 사찰을 오랫동안 지켜온 가야산을 올랐다. 무서운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을 만큼 상서로운 산이다. '여자승람'에는 “가야산의 모양새는 천하에 으뜸이요, 지덕이 또한 비길 데 없다(古記云伽倻山形絶於天下之德雙於海東)”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물상을 지나 칠불봉(해발 1,433m)까지 가는 산행은 해발 600m에서 시작한다. 보통 등산로는 완만하게 시작하는데 만물상을 오르는 길은 처음부터 30도의 급한 경사라서 우리는 준비 체조를 했다. 10년 전에는 입산이 통제되었을 만큼 험했지만, 계단을 만들어서 이제는 누구나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정오를 지나면 산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보통 산행을 시작하면서 마음이 들떠서 수다스럽다. 그러나 만물상을 향한 길은 가파르고 험해서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우리는 조용히 한 발짝씩 발을 내디뎠다. 깎아지른 바위 사이에 계단을 만든 기술이 놀라웠다. 숨을 고르느라 잠시 멈추면 미술관의 명작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회색 바위는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사이좋게 솟아 있고, 그 사이로 나무가 아슬아슬하게 자라거나 풀이 덮여있다. 바위는 아무렇게나 생긴 듯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의 만물을 신기하게 닮았다.

스피노자는 기독교 또는 유대교의 유일신을 부정하고 자연이 신이라고 주장해서 유대교에서 파문당했다. 하느님은 이 세상 저 너머 어딘가에 계신 분이 아니라 모든 자연물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높은 산에 올라 풍경을 보면 스피노자가 주장한 신에 대한 개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신성하게 다가와 인간에게 나긋하게 가르친다. 네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고. 겸손해지라고.

한 봉우리를 넘고 나면 저만치 다른 봉우리의 길 사이로 산양처럼 위태롭게 걸어가는 등산객이 보인다. 7개의 봉우리를 넘는 데 한 3시간쯤 걸렸다. 가장 높은 칠불봉에서 조금 내려오면 상왕봉이다. 우리는 상왕봉에 올라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면서 힘든 산행을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흥분해서 상기되었다. 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이 구름 위로 고개를 내밀어 정상을 보여주었고, 덕유산 꼭대기가 아스라이 드러났다. 미세먼지 속에서도 높은 산의 위엄이 넘쳐 흘렀다. 

가야산은 속절없이 멸망하여 패자의 역사로 남은 고대 국가의 영광과 슬픔을 품고 있다. 만물상의 끝인 '상아덤'에는 삼국 시대의 신비한(삼국사기에만 기록이 남은) 나라 가야의 탄생 설화가 깃들어 있다. 산신인 여신 정견모주는 상아덤에 내려온 하늘신 이비가와 부부가 되어 아들(대가야의 왕 이진아시와 금관가야의 왕 수로왕)을 낳아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들었다. 가야는 철기문화가 발달하고 일본과의 교역도 활발했다. 그러나 결국 멸망했고 마지막 군주 도솔지왕은 가야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늘 아쉬운 정상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내려오는 하행 길은 완만하여 편안했다. 조릿대 숲의 바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치듯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조릿대가 많이 자라면 금방 길이 없어지고, 조릿대에 파묻히면 '알바'하기 쉽다. 그래서 산꾼들은 조릿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몇 주 전에는 선명한 색이었던 낙엽이 진갈색으로 바짝 말랐다. 조용한 산속에서는 우리의 등산화가 내는 낙엽 밟는 소리만 들렸다. 나무는 다가올 추위에 단단히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가파른 초입 등산로와 달리 편한 내리막길을 걸으니 모두 말이 많아졌다. 처음 본 여자가 제일 예쁜 것처럼 처음 가본 산이 가장 매력적일까 하고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가야산은 몇 번을 와도 매력이 넘칠 것이다. 

서둘러 내려온 덕분에 장경판전 관람 마감 30분 전에 도착하였다. 가야산의 봉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거의 같은 필체로 새긴 팔만 이천여 개의 경판을 고이 모셔놓은 건물을 감싸고 있다. 범접하지 못하도록 험난한 산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해인사를 보호할 기세다. 760년이 된 대장경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지금도 목판의 구실을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상서로운 분위기가 맴돌아 자연적으로 습기와 채광을 조절하는 과학적인 기술만으로는 이 완전무결한 세계 문화유산을 설명할 수 없다. 동지에 책장 맨 아래까지만 햇볕이 들어오도록 채광을 절제하고, 창의 크기를 앞뒤로 다르게 하여 바람이 넘나들어 습기가 차지 않도록 설계했다. 나는 5천 2백여 만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대장경을 나무 빗살 사이로 엿보았다. 대장경은 이집트 파라오의 미라처럼 보였다. 

꽉 채운 하루의 태양이 산 뒤로 넘어가면서 오래된 절을 부드럽게 비추었다. 그 빛 속으로 아쉬움과 만족감, 설렘과 회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먼지처럼 사라져 청정한 마음이 되었다. 1,000년 전 이 산속의 절에 말씀을 이고 오던 사람들의 절실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모른다.      


이전 09화 운 좋은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