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산 석모도 해명산, 상봉산, 보문산 (2018년 12월)
매일 영하 10도의 한파로 온 세상이 얼어붙었다. 따뜻한 계절에는 겨울 산행이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 산의 매력에 빠져 추위쯤은 감수할 수 있다. 날이 청명하다, 시야가 좋다 등의 혹한의 장점을 꼽으면서 겨울 산행을 준비했다. 한 번을 가더라도 필요한 물건이 있다. 등산용 내복(땀이 잘 흡수된다), 고아텍스 겨울 장갑(뻑뻑하기는 하지만 보온은 확실했다), 바람막이 자켓, 버프, 스패치 등의 등산용품은 가혹한 추위에도 산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실제로 방한용품은 요긴했고, 준비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고가의 브랜드보다는 기능성 위주로 산 물건을 겨울 산행마다 두고두고 쓸 수 있기를 바랐다.
겨울 산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가지 사이로 해가 쨍쨍하게 들어오고, 빛을 받은 축축한 땅은 말랑말랑했다. 바람골을 지날 때는 살이 에이는 찬 바람이 불기도 하지만, 능선을 오르고 내릴 때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견딜만 했다. 무라카미 하루끼는 ≪달리기를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간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나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했다”라고 말한다. 내가 추운 날 험난한 산에 오르는 이유와 작가가 마라톤을 하는 이유는 비슷하다.
강화도가 본 섬인 석모도는 작년 초까지만 해도 유람선으로 드나들었는데 최근 다리가 생겨 육지가 되었다. 우리는 전득이 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해명산, 방개고개, 새가리 고개, 상봉산 정상에 올랐다가 보문산으로 내려왔다. 벌거벗은 나무들 사이로 금빛 갯벌과 외로운 섬들이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그리 높지 않은 섬 산(200~300m)의 능선이지만, 오르내리는 내내 양옆으로 바다와 섬과 논이 시원하게 보여서 하늘 가운데를 가로질러 걷는 기분이었다. 오후가 되자 바닷물이 흘러들어와 파도가 남긴 주름이 선명한 모래밭을 조금씩 적셨다. 강추위로 먼지가 살짝 쓸려 갔는지 세상에서 우리만이 갈 수 없는 나라, 북한이 가까이 보였다.
강화도 <새벽 해장국>에서 황태해장국을 든든하게 먹었는데 추위를 견디느라 에너지를 다 써 버려 금방 출출했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편편한 곳에 노란색 피라미드 천막을 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겨울 산행을 할 때는 보온 도시락에 넣은 찰밥과 보온병에 넣은 더운물이 요긴하다. 컵라면 같은 따끈한 MSG 국물을 마시면 얼었던 속이 뜨뜻하게 풀린다. 움직일 때는 살짝 땀이 날 정도로 덥기도 하지만, 멈추기만 하면 한기가 몰려와서 있는 옷을 다 껴입는다. 겨울 산행에서는 땀이 나기 직전 옷을 벗고 한기가 들기 전 옷을 입는 요령이 필요하다. 두꺼운 점퍼를 벗어 배낭에 잡아맨 나의 모습은 진짜 산꾼이었다.
보문사는 3대 도량 중 하나로 유명하다. 절 뒤의 절벽에는 눈썹 바위가 있는데 수험생 부모들이 많이 와서 기도한다. 산에서 내려오며 보이는 눈썹 바위는 진짜 눈썹처럼 절벽에 붙어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촛불이 타오르며 사람들의 소망을 전하고 있었다.
신라 시대에 지어졌다고 하지만 새로 단장을 했는지 멀리 보아도 으리으리한 절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게다가 주위에는 살벌한 쇠창살을 쳐서 가는 길을 막았다. ≪반야심경≫에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완성되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육바라밀> 중 첫째가 “보시” (布施) 라고 한다. “보”는 땅에 스며드는 것처럼 천천히 넓게 퍼진다는 뜻이고 “시”는 베푼다는 의미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회에 갚는다는 뜻이다.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에 돈을 받는 보문사의 스님에게 “보시”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인색한 절 인심에 토라져서 절 구경을 하지 않았다.
섬을 가로질러 걸었기 때문에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와야 했으나 버스가 가지 않아 근처에서 내려 걸었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긴 산행으로 지쳤고 경사길이라 힘들었는데 마침 동네 어르신이 우리를 보고 차를 세워 태워주었다. 절에서 거절당한 보시를 대신 받은 것일까. 우리는 “보시”차를 타고 오면서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산행 뒤풀이는 <충남 서산 꽃게탕>에서 했다. 줄을 서서 먹는다는 식당의 명성만큼이나 꽃게탕 국물이 진하고 구수했으며 밴댕이 무침도 신선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가 오거나 혹은 눈이 쏟아져도 강행한 산행의 감동은 매번 새로웠다. 날씨가 궂은 날 험한 산을 떠날 때는 살아 돌아오겠다는 비장한 각오까지 하고 떠나지만, 산은 언제나 관대하고 편하게 사람을 맞이하고 보냈다. 또한 산행 코스를 준비하고 어려운 순간에는 도움을 준 친구들의 산과 같은 ‘보시’ 덕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걸었던 산과, 함께 했던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만큼 2018년 마지막 산행을 마무리하는 꽃게탕은 깊고 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