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설악산 (2018년 10월)
서양의 철학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철학자의 사상이 능선처럼 이어진다. '군나르 시르베크. 닐스 길리에'의 저서 ≪서양 철학사≫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읽는 일은 등산과 비슷했다. 어떤 철학자는 가파른 경사길 오르기처럼 진땀 나게 어렵고, 또 어떤 철학자는 능선을 걷는 것처럼 비교적 쉽다. 하지만 세상에는 쉬운 산이 없듯이 철학자들 모두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어떤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오래 머무르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을 읽어주는 철학자의 사상에서는 다시 읽고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칸트는 풍경이 색다르게 아름다워서 오래 머물고 싶은 산 같은 철학자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내로 공부하고, 뒤늦게 교수가 되고 책을 출판했던 그의 철학적 사유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이 뛰어나다. 당시 유럽의 사상은 대륙의 합리론(rationalism)과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이 두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스피노자에서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합리론은 보편적 이치, 즉 형이상학적 진리를 지식의 근원으로 보았다. 반면 경험론은 로크와 흄이 주장하듯이 선험적 진리는 분명하지 않고 실증을 위한 경험을 중시했다. 이러한 두 흐름 속에서 데이비드 흄은 마담 뽕빠두르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프랑스에서 자신의 경험론을 급진적으로 펼치고 합리론은 거의 명맥을 잇지 못했다. 칸트는 흄의 영향을 받고(“솔직하게 고백하겠다. 내게 데이비드 흄은 이런 사람이다. 그는 내가 수년 동안 빠져 있었던 독단의 선잠에서 비로소 깨어나게 했고, 사변 철학 분야에서의 나의 연구에 완전히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인간의 인식 도구인 순수 이성에 대해 낱낱이 해부하고 한계를 밝히고자 했다. (순수 이성 비판)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자신이 합리론자인지 경험론자인지 잘 몰랐던 사람들도 칸트의 책을 읽고 나서야 자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흄의 경험론에 의하면 인식은 순전히 경험으로 구성된다. 인간의 선험적인 보편적이고 순수한 이성을 믿고 있던 합리론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 두 사상의 장단점을 받아들여 정리했고 그 사상을 ‘비판 철학’이라 했다. 즉 경험과 이성 모두 인간의 지식과 판단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이렇게 인식의 도구인 이성 자체를 도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진리와 인식의 기준을 객체(나 아닌 것)에서 주체(나)로 전환하는데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말한다. 이는 모호했던 형이상학적 철학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칸트 철학은 전 시대의 사상을 통합 정리하였으며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음악, 미술, 문학의 표현 방식이 다양해지도록 영향을 준 철학자이기도 하다.
철학은 윤리학과 함께 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그래서 어찌하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 칸트 선생님은 이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답해주었다. '실천이성 비판'에서 그는 내면에 존재하는 '선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하였다. 선한 행동을 하면 보상을 받아 천국에 간다는 기독교의 기본 원리를 칸트는 천박하게 보았고(‘도박사 논쟁’으로 기독교를 우회적으로 공격했다) 자신만의 당당하고 굳건한 의지로 선을 실천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언명령) "너의 준칙(maxim)이 보편법칙이 되도록 행위하라" 사실 기독교인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하느님의 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 하는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인 나 또한 혼란스러웠음을 고백한다.
햇살이 부드럽게 만물에 내리는 가을날, ‘산중 미인 (山中 美人)’이라는 설악산을 등반하였다. 인제에서 셔틀을 타고 백담사로 가서 걷기 시작하여 영시암, 오세암, 마득령을 넘어 비선대로 하산하였다. 등산 초입부터 설악산은 좀 달랐다. 계곡물은 비취색으로 우아하게 흘렀고, 서둘러 색을 바꿔입은 나무들이 가을 햇살에 황홀하게 반짝였다. 산속에 오롯이 앉아 있는 오세암에서 주는 미역국과 밥은 뜨뜻하게 허기를 채워주었고, 목이 마르면 계곡물을 그대로 떠 마셨다. 마득령의 경사는 만만하지 않지만, 단풍나무가 눈이 부시게 빛나는 길목마다 쉬면서 기운을 얻었다. 힘든 만큼 나무는 더 빛나고 아름다웠다. 만경대에서는 공룡능선과 외설악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저 무시무시한 곳을 등반할 꿈을 꾸었다. 비선대를 내려오는데 깎아지른 암벽에 원효대사 혹은 의상대사가 파놓은 바위굴이 있었다. 험해서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도인이 수행하는 은신처로 삼을 만했다. 그들이 아름답지만 가혹한 자연 한 가운데서 터득한 도 혹은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칸트는 깊은 석굴 속에서가 아니라 독일의 작은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사유하고 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프랑스 파리를 한 번도 가보지 않고도 그 도시를 누구보다도 세세하게 설명하였으며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했다. 임종하기 전 의사 앞에서 예의를 갖출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하고 준칙(maxim)을 지키려고 했다. 그의 묘비에는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라고 새겼다.
산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설악산을 오르면서 철학의 개척자 칸트를 떠올린 것은 선험적 이성과 감각을 통한 경험이 함께 작용한 인식이었을까. 등산과 철학 공부는 통하는 구석이 많다. 산을 하나 오를 때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산을 가야 할 이유가 또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