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산 사패산 (2019년 4월)
선조는 애지중지하던 딸을 시집보내면서 사패산을 선물했다. 선조의 여섯째 딸 정휘옹주와 결혼한 유정양은 평소 장군이 되고 싶었으나 부마의 신분이라 꿈을 이루지 못해 한탄했고, 옹주가 그 당시 유행하던 장죽을 물고 다니자 부부싸움이 났다. 옹주는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고해바쳤고 유정양은 궁에 불려갔다. 하지만 그는 왕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선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 선조는 성격이 인절미처럼 녹록하지 않은 딸을 잘 봐달라고 사패산을 주었을까.
기가 센 옹주 부부의 산이었던 사패산을 올라 사패능선을 따라 걸어 도봉산으로 가서 아찔한 Y계곡을 건너고, 신선대를 올라갔다. 그리고 옥처럼 고운 물결이 이어지는 송추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사패산의 정상은 널찍해서 맘껏 쉬면서 조망을 즐겼고, 능선에서는 연두 잎이 나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낯익은 북한산 봉우리들을 보았다. 그리고 “10년간 사망자 25명”이라고 써있는 살벌한 위험경고를 지나 철제 난간에 매달려 간신히 Y계곡을 넘어갔다. 바위틈새에서 핀 이름 모를 꽃이 잔뜩 긴장한 우리를 보고 웃었다.
지난 달만해도 나무들이 벌거벗어 사방이 횅했는데 한 달 만에 산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만 있어서 이름이 없었던 나무들이 제각기 다른 이파리를 달고 무명의 시간을 견디었다고, 이제 이름을 불러달라고 말했다. 우리는 진달래가 핀 나무가 호위하는 산길을 걸었다. 성질 급한 꽃은 벌써 땅에 떨어져 땅에는 분홍색 카펫이 깔렸다.
무궁화보다 진달래를 나라꽃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시의 제목이 ≪진달래꽃≫이고, 새색시의 치마가 진달래색이며, 우리 산에 지천으로 피어 봄의 희망을 전하는 꽃이니 당연한 주장일지 모른다. 꽃의 색은 아주 연한 분홍부터 진한 분홍까지 다양하고, 꽃이 지면서 하트모양의 작은 잎이 피어난다. 이파리가 나기 전 가냘픈 나뭇가지에 꽃봉오리가 알사탕처럼 매달려 있어 앙증맞고 고고하다. 가지는 낭창낭창 휘어질 듯하지만 꺾어질 만큼 약해 보이지는 않는다. 새로 핀 꽃이나 지고 있는 꽃이나 색이 바래지 않고 모양도 흐트러지지 않아 땅에 떨어져도 우아한 모습 그대로이다. 떨어진 꽃들은 금방 화전을 부쳐 먹어도 될 만큼 색이 곱다. 행복한 꿈속에서 나타나는 모습 같은 연분홍 물결에 감탄하면서 커다란 바위가 많고 경사도 만만하지 않은 두 산의 큰 봉우리를 다섯 번이나 오르내렸다.
'반하다'라는 말 앞에는 '홀딱'이란 수식어가 적격이다. '홀림'의 발달 단계. 그 어떤 호감들에 비해, 그만큼 순도 백 퍼센트 감정에만 의존된('의존한'이 아니라) 선택인 셈이다.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만, 그리 쉽게 끝나지는 않는다. 어차피 아무런 판단을 동원하지 않고 행한 호감의 의식이므로. 벼락처럼, 자연재해처럼 한순간에 완결되는 감정이지만, 수습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 사전≫ 김소연
지루한 꽃샘추위가 끝난 이 봄에 피어난 꽃에 나는 홀딱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며칠 밤을 지내고도 그 황홀한 분홍색 자태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아마도 '수습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