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산 팔영산 (2019년 3월)
연휴 첫날 남쪽으로 가는 도로에서 버스는 가다가 서다가를 반복했다. 게다가 우리 산행지 팔영산은 국토 최남단 전남 고흥에 있었다. 그래도 여기저기 잘 뚫어놓은 길 덕분에 예정 시간을 아주 많이 지나지 않아 산행을 시작했다. 점심때가 다 되어 산에 들어가는 사람은 흔하지 않은지 동네 아주머니가 산에 오르기 시작하는 우리를 보고 “오메”하면서 쳐다보았다. 8개의 팔영산 봉우리는 멀리 보아도 위세가 등등해서 서울에서 온 풋내기 등산객은 마음이 바짝 졸아 들었다.
처음 오르는 길은 보드랍고 푹신한 흙길이고 완만했다. 아직 새순이 나지 않았지만, 추위로 뻣뻣했던 나뭇가지가 이른 봄볕의 보드라운 기운에 긴장을 풀어 생명력을 내뿜었고, 드문드문 달린 초록 잎은 통통하게 살이 쪄 윤기가 흘렀다.
첫 번째 봉인 유영봉(491m)에 올라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널찍한 바위 위에 각자의 도시락을 펼쳤다. 우리는 남쪽 지방에서 봄 같은 따스한 날씨를 미리 맛보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그리고 성주봉(538m), 생황봉(564m), 사자봉(578m), 오로봉(579m), 두류봉(596m), 칠성봉(598m), 적취봉(608m), 정상봉인 깃대봉(607m)까지 돌로 된 봉우리를 산양처럼 오르고 내렸다. 철제 계단과 손잡이가 단단해 보이지만, 깎아지른 절벽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여섯 번째 봉우리인 두류봉은 송곳처럼 하늘을 찌를 듯해서 올라가면서 잠시 아득하게 심연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덩치가 산만 한 친구가 돌벽 앞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뒤에서 밀어주었다. 아닌 척했지만, 사실 나도 무서웠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간신히 여덟 번째 봉을 넘은 친구가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다시는 이런 산에는 오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병풍처럼 펼쳐진 9개의 봉우리 정상에 우뚝 설 때마다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는 산과 들, 섬을 품고 있는 바다 풍경이 무심하게 평화롭고 따뜻해서 우리는 힘을 얻었다. 팔영산은 한반도를 물결치며 내려온 백두 대간이 바다를 만나 찍는 마침점이다. 대간의 기운을 모아 아홉 개의 높고 거친 봉우리로 치솟은 산을 오르려면 죽음에 가까운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 봉우리인 깃대봉에서 내려와 하산하는 길에는 향기를 내뿜는 키가 큰 편백 나무가 빼곡했고, 계곡물이 빠르게 흐르면서 봄이 온다고 아우성쳤다.
산에서 시간의 흐름은 산 밑과 달라서 얼마나 걸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정신의 삶≫(the life of the mind)에서 시간에 관한 흥미로운 관찰을 했던 한나 아렌트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곳, 시계와 달력의 저편에 영원히 존재하는 완벽한 고요, 시간에 쫓겨 허덕이던 인간적 존재가 조용히 머무는 곳, 시간의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이 작은 비시간적 공간이여"라고 말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몰랐던 나무꾼’처럼 우리는 아홉 개의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는 동안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 산에서의 시간은 아렌트의 말처럼 '시간의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비시간적 공간'이 아닐까.
남도의 간간한 나물 반찬, 탱탱 낙지와 전복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보니 외등 하나 없는 산골 마을에 내린 어둠이 짙푸르고 차가웠다. 다시 겨울이 온 것 같았다. 산에서 보내는 시간은 정말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