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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Jul 15. 2024

과함의 예술

멜빌과 가우디

시인이자 번역가 황유원은 ≪모비딕≫을 윌리엄 블레이크의 한 시구절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The road of excess leads to the palace of the wisdom.

과도함의 길은 지혜의 궁전에 이르게 한다.      

극한의 경험에 뛰어들어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통찰과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소설 ≪모비딕≫은 7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이기도 하지만, 통상적인 소설의 한계를 넘어 읽는 내내 숨을 할딱대며 좇아가야 한다. 고래를 향한 복수가 일생의 목표인 선장의 무협지이고, 고래에 대한 깨알 같은 백과사전, 다양한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돋보이는 철학서, 바다와 항해를 유려한 문장으로 그린 수필이기도 하다. 매 장 독특하고 다른 내용이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주제가 관통한다. 바다와 인간, 고래, 그리고 신이다. 독자는 이슈마엘이 되었다가, 에이허브가 되기도 하고, 하얀 고래 모비딕이 되는데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없다. 나다니엘 호손이 말한 것처럼 ‘사악하지만 순진무구한 책’이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바닷물처럼 소설의 결론은 미완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고 소설 모비딕을 떠올렸다. 성당의 첨탑은 가우디가 어릴 때 보고 자란 몬세라트 산의 봉우리 같이 둥글고 높으며, 동쪽 파사드에 새겨진 예수님 탄생 부조는 실제 사람을 이용해 몰딩을 만들어 소름이 끼치도록 생생하다. 내부로 들어서니 천국의 숲처럼 찬란한 자연 채광이 내리꽂혀 할 말을 잊었다. 

가우디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성당을 완공하지 못할 것을 예상했다. 기존의 건축 법칙(돔을 지지하는 부벽을 세우는 고딕양식)이 아니라 자연을 닮은 곡선으로 된 하느님의 집을 짓기 시작했고 후대는 그의 뜻을 이어 아직도 짓는 중이다.(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건축을 완성하게 될 시간은 예측하기 어렵게 무한하고, 규모와 형태는 종잡을 수 없게 웅장하지만, 그가 평생 절실하게 믿었던 신과 경쟁하지는 않는다.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과장된 조각과 첨탑의 형태는 하늘의 지혜에 닿기 위한 몸부림이다. 가우디의 대성전은 멜빌의 소설처럼 ‘과도함의 길을 통해 신성함에 이르고자’ 했다. “인간의 광기는 하늘의 지혜이고 인간은 이성에서 벗어나야 이성의 기준으로는 어리석고 광적으로 보이는 천상의 지혜에 도달하게 된다”고 멜빅이 소설 속에서 말한 것처럼.

흔히 ‘오버하지 말라’고 한다. 글을 쓸 때에도 지나친 표현을 쓰지 않도록 조심한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성가족 성당을 마주했을 때나,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생경했던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어떤 선을 넘어선 과도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도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일 뿐 ‘과함‘의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멜빌은 일신교에 대해 냉소적이었고 가우디는 가톨릭 신앙에 충실했다는 다른 점이 있지만, 자연에서 웅장한 힘을 발견해 과장해서 표현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두 작가는 통한다. 보통 사람에게 그들의 ‘오버한’ 작품은 버겁다. 그러나 대작가들은 그 안에서 ‘천상의 지혜’에 도달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랐다. 

위대한 작가들의 과장하고 선을 넘은 작품을 보고 나니 슬그머니 나도 흉내 내고 싶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지만.      


≪모비딕≫을 읽은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가는 자신을 적자가 아니라 버려진 자식 ‘이슈마엘’로 보았다. 그리고 그 당시 기독교만을 유일한 정통 신앙으로 여기던 사람들에게 다른 종교를 가진 ‘식인종’이나 ‘원시인’ 또한 선한 인간임을 가르치려 했기 때문에 이 책이 반응이 싸늘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야기했다. 성경에 통달한 친구들은 책 속에 나온 구약의 이야기(요나)와 인물(아합왕)이 상징하는 의미를 찾는 재미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잡으려다 실패한 고래 모비딕이 무엇일까에 대해 각자 말했다. 어떤 친구는 고래는 공(空)같은 벽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고, 또 어떤 친구는 하느님으로 본다고 했다. 나는 누구나 인생에서 쫓는 허황한 신기루 같은 욕망이 아닐까 생각했다. 친구들은 고전을 읽기가 부담스럽지만, 이제는 이순(理順)의 나이가 되었으니 어떤 책보다도 고전을 읽어야겠다고 말했다. 어렵고 긴 책을 같이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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