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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Jul 15. 2024

산이 가르쳐주다

설악산 대청봉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이지 않을 수 없다고 다윈이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진화생물학자는 주장한다. 역시 진화론자인 로버트 트리버스는 ‘호혜적 이타주의’를 설명하면서 나중에 돌려받기 위해 남을 위한 행동을 하는 인간은 결국 이기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종교의 현자들은 미성숙 상태로 태어나는 아기가 성숙할 때까지 돌보는 어머니의 사랑 같은 조건 없는 이타주의가 인간의 본성이니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고 가르친다. 각자도생(各自圖生)과 이타주의(利他主義). 극단적인 두 마음 사이를 끊임없이 방황하는 우리에게 산은 위대한 구루처럼 인류의 소중한 자산인 ‘이타주의’를 실현하라고 가르친다. 

사실 설악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푸르게 보인다고 청(靑)자가 들어간 대청봉(1,708m)을 하루에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는 쉽지 않았다. 한계령에서 시작하여 서북능선을 타고 올라가 끝청, 소청을 지나 대청봉에 오르고 남설악 탐방 지원센터까지 가파른 하산길로 내려오려면 거의 9시간이 걸린다. 짧게 쉬고, 빨리 먹고, 가슴이 먹먹한 경치를 아쉬워하며 돌아서도 일몰 전에 간신히 내려오는 일정이라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친구 세 명의 100산 완등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하고 누군들 시월의 설악산 산행을 마다하겠는가? 산을 자주 다니고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아도 중간에 쥐가 나거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예상보다 오래 걸린다. 나는 산 뒤로 넘어가는 말간 해를 초조하게 바라보며 가파른 경사의 돌길을 조심조심 내려왔다. 하루를 불태운 태양은 가차 없이 떠나고 잠시 어스름한 빛을 남기지만, 곧 사위가 깜깜해졌다. 비교적 걸음이 빠른 편인 나는 일몰 직후 내려왔지만, 랜턴 빛에 의지해 새카만 내리막 산길을 걸어야 할 친구들이 걱정되었다. 늦게 온 한 친구에게 힘들었냐고 물었더니 “친구야, 너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산에서 내려와 본 적 있니?” 하고 정색을 하며 말하곤 웃었다. 

푸른 숲을 조금씩 물들이는 단풍나무가 군데군데 보였다. 나는 올해 첫 단풍잎을 하나 주어 간직했다. 또다시 일 년이 흘러 나무는 겨울 준비에 바쁘다. 조금 높이 오르자 오래전 짙은 초록의 잎을 달고 있었을 ‘서서 죽은 나무’ 주목이 살아 있는 나무 사이에서 ‘한 줄기 벼락처럼 꽂혀 있었다.’* 자작나무는 유난히 파란 하늘을 이고 은빛으로 반짝였다. 가을의 낭만을 풀어가는 서북 능선에서 보는 내설악과 외설악은 바쁜 걸음에 슬쩍 보아도 근사한 이성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솔길을 지나갈 때 황금빛 물이 든 나무 사이로 투명한 햇볕이 쏟아지면 조명을 받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길이 하나뿐이라 일행과 떨어져도 안심이 되었지만, 광대한 설악의 한 점이 되는 순간이 오면 진한 고독이 밀려왔다. 

우리는 대청봉에서 100산 완등을 하는 세 친구를 시끄럽게 축하해 주었다. 플래카드에는 함께 산행했던 친구에 대한 우정어린 칭찬의 말과 근사한 사진이 들어있었다. 높고 깊은 산의 시발점인 대청봉은 힘들게 도착해 호들갑스러운 등산객을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이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 키가 자라지 못한 관목이 퍼져있었다. 북쪽으로는 금강산의 꼭대기가 넘실대고 하늘과 맞닿은 동해는 푸른 보석처럼 빛났다. 치졸하고 보잘것없는 나에게 이 땅은 얼마나 과분하게 아름다운가!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초가을의 햇볕이 그대로 쏟아지는 봉우리 끝에서 부끄러움 때문인지, 빛 때문인지 하늘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만큼 아름답지는 못하다. 물이나 도시락이 없으면 나누어 먹고, 빨리 걸을 수 있어도 동료의 발걸음에 맞추어 불을 비추어주고, 걷기 어려운 친구의 짐을 들어주고 부축해 지루하고 긴 여정을 함께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친구는 올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친구가 걱정되어 다시 산에 올라가 같이 내려왔다. 큰 산이 우리에게 황금률을 가르쳐 준 것일까. 우리는 뒤풀이 식당에서 어둠을 헤치고 돌아오는 친구들이 들어올 때마다 안도하며 박수를 보냈다. 산속의 밤은 지독하게 깜깜했지만, 산보다 더 아름다운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에는 빛이 가득했다. 

*나무는 서서 죽는다-박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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