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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Jul 15. 2024

삶은 책 한 권

70년, 80년대에는 제주도 여행은 거의 외국 여행이었다. 인생의 대사를 치른 신혼부부가 제주도행 비행기에 오르면 해외여행과 비슷한 사치였다. 울긋불긋한 한복이나 말끔한 투피스를 입은 젊은 새댁은 양복을 입은 새신랑과 함께 택시를 대절해서 섬을 돌아다녔다. 지금처럼 근사한 카페나 관광지가 없어도 화산섬 제주는 자연 그 자체로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기사는 관광 가이드를 하면서 풍광이 좋은 장소에 서라고 하고 사진을 찍어 주었다. 대부분 제주도 토박이인 기사는 육지 사람이 잘 모르는 섬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해주었다. 

제주를 좋아하는 부모님을 둔 덕분에 나도 초등학생이었을 때부터 1년에 한 번 제주도를 가는 호사를 누렸다. 바람, 돌, 여자가 많은 섬에서 남자는 바다로 나가서 귀하고 여자는 물질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억세게 일한다, 이 섬에는 원래 뱀이 없다, 험한 한라산을 넘는 5.16 도로를 뚫으려고 육지의 부랑자를 다 모았다… 엄마, 아빠, 동생과 택시에 타면 기사 아저씨는 지금은 누구나 아는 제주도에 관한 상식을 신나게 이야기했고 나는 뒷자리에서 열심히 들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박했다.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은 자극적인 맛 없이 투박했다. 숙소는 변변하지 않았고 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 짚을 단단히 여민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다. 차선도 없는 작은 도로를 달리다 보면 해풍에 말린 오징어나 해녀가 금방 잡은 해삼, 멍게를 팔았다. 발가벗거나 낡은 팬티를 입고 바다에서 노는 제주도 아이들은 검은 잠수복을 입은 해녀처럼 탄탄하고 야무졌다. 그 당시 제주 사람들은 낯설고 먼 이방인처럼 보였다.

태평양을 향한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는 위치에 원래는 이승만 대통령의 겨울 별장이 있었다. 그곳에 ‘허니문 하우스’라는 이름도 달달한 호텔이 있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거의 원시 상태였던 제주에서는 화려한 호텔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머문 적은 없다. 하지만 해풍의 흐름 따라 자란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바닷가에서 부모님이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이 있으니 분명 나도 그곳에 갔을 것이다. 그때도 바다가 멀리 보여 호수처럼 잔잔한 수면 위로 윤슬이 빛나고 해가 떠오르거나 질 때 수평선까지 붉은 길을 내었을 것이다. 

‘허니문 하우스’호텔은 파라다이스 호텔이 되었다가 문을 닫고 오래 비어있었다. 그리고 최근 다시 ‘허니문 하우스’라는 베이커리 카페로 문을 열었다. 지중해풍으로 오래 전 지은 하얗고 낮은 건물에 덩굴 식물이 올라가고 거무튀튀한 얼룩이 생겼지만, 오히려 고고하고 조용하게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카페의 앞마당과 유리창 너머로 그 옛날의 바다와 섬, 소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책 한 권이 저절로 써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장 아니 에르노는 소설 ≪세월 les années≫에서 80년이 넘게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열했다. 통찰력이 빛나고 주관이 뚜렷한 그녀의 이야기는 무미건조하고 솔직한 문장에 담겨 감동과 여운을 준다. 딸로서, 여자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다시 여자로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서사는 치열하고 슬프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은 그녀의 삶을 더욱 혼란스럽고 고단하게 한다. ‘나’와 ‘타인’, 그리고 ‘세계’는 결국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의 결정체가 되지만, 작가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아온 작가는 왜 살아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을까. 

4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아들과 친정엄마와 제주도를 다녀왔다. 허니문 하우스의 바닷가 소나무 아래에서 수줍은 미소를 띠고 사진을 찍었던 젊은 엄마는 이제 아니 에르노처럼 80세가 넘었고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 나이가 더 많다. 그리고 나의 첫 아이는 서른이 넘은 직장인이다. 엄마와 나, 아들은 우리처럼 어처구니없이 세월을 먹은 건물 앞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앉아 ‘아무것도 없는’ 삶을 회상했다. 노벨상 작가처럼 살아온 날들을 세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거칠지만 따뜻했던 예전의 섬과 부모님과 귀한 여행을 하며 겪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라 바다에서 불어오는 순풍처럼 포근했다. 

이제 제주도에는 발가벗고 수영하는 아이들을 찾을 수 없고 줄로 엮은 초가지붕의 집은 민속 마을이나 가야 볼 수 있다. 섬의 아주 외진 곳까지 길이 나고 풍광이 좋다고 알려지면 금방 소문이 나서 더 이상 한적한 곳은 없다. 완전히 변한 섬의 모습 속에서 오래된 건물과 아직 버티고 있는 바다와 나무, 태양이 한결같아서 우리가 살아 온 시간이 고맙고 대견했다. 감히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문장을 다시 써본다. ‘살아 있다는 것은 책 한 권이 저절로 써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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