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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Jul 15. 2024

시간, 나이 그리고 환갑

영실계곡에서 환갑잔치

레비나스는 시간의 본질을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 특히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찾는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덧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나 영향을 받고 새로워지면서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초월적이므로 진정한 의미로 신과 만나는 통로가 되는 시간은 정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어마어마한 선물이다. 

동양에서는 진즉에 오래전부터 시간을 ‘수’로 파악하지 않고 추상적인 하늘의 기운(天干)과 구체적인 땅의 기운(地支)을 합하는 인간의 삶으로 이해했다.(干支) 갑자(甲子)로 시작하는 해는 60년 후 다시 갑자(甲子)로 돌아오니 동양의 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신비하다. 그래서 태어난 해가 다시 돌아오는 환갑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새로운 순환이 시작하는 한 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100세가 우스운 요즘 세상에도 60살 생일은 가볍게 보지 않고 그 시간의 무게와 의미를 축하한다. 나의 용띠 동기들은 올해 환갑을 맞이했다. 가족이 간단한 상을 차려주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면서 ‘축하’ 잔치를 한다고 자랑이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열정만큼은 ‘젊은이’ 못지않은 친구들이 예순 살이 되어 ‘노인’의 반열에 들었음을 스스로 공표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하지만 몇 달 후 환갑이 되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자축했다.

우리는 축하의 한 행사로 한라산에 갔다. 산꾼들이지만, 환갑 어르신답게 백록담을 오르는 몇 명을 빼고는 영실 코스를 걸었다. 원래 이 시기에 영실의 숲은 분홍 물감을 풀어놓은 것 처럼 산철쭉이 핀다. 하지만 올해 산철쭉은 조릿대가 극성으로 퍼져 잘 자라지도 못한데다가 봉오리가 맺히는 시기에 냉해를 입어 피지도 못하고 시들었다. 푸르다 못해 검은 신록 사이에 때죽나무가 피운 하얀 꽃만 눈에 띄었다. 죽어서 은빛으로 말라버린 구상나무가 해를 받아 기세등등하게 빛났다. 햇볕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바람이 맑고 서늘하게 불어와 나무 계단이 친절하게 놓인 영실 산행은 가벼웠다. 대부분의 산철쭉 봉우리가 누렇게 시들어 말랐어도 가끔 귀한 보물처럼 꽃을 발견했다. 다른 꽃보다 늦게 봉우리를 맺어 살아남은 꽃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도 인생이나 산행이나 결국 도달하는 곳은 같다. 나는 좀 빨리 올라와 선작지왓에 있는 널찍한 데크에 도착했다. 선두가 너무 빨리 간다고 야단하면서도 잘 올라온 친구들은 구상나무 숲을 지나 느닷없이 나타난 평전(坪田)에 빠져들었다. 산상의 너른 벌판에는 이끼가 자란 화산암이 흩어져 있고 백록담 남사면의 무시무시한 절벽이 보였다. 우리는 지고 온 도시락을 먹고 벌러덩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투명하게 파란 하늘에 눈부시게 하얀 구름이 천천히 가면서 60살 ‘젊은이’들을 내려다보았다. 10년 뒤에도 친구들과 함께 영실을 올라올 수 있을까. 영실쯤은 올 체력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끝없는 하늘을 보며 다시 또 10년 뒤를 생각했다. 한라산 꼭대기에 누워 산의 기운을 받으니 낡은 몸의 감각이 뚜렷하게 열렸다. 순수한 자연은 눈으로, 귀로, 피부로 다가와 고단한 60년 삶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만큼 사라져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라고 시인 김경주는 말했다. 그러나 시간은 물이나 돈처럼 써서 없어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맛있게 농익는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분명 아름답고 자랑할 만 한 일이다. 

또 다른 축하 행사인 동기회 모임에서는 어리둥절하게 돌상을 받았던 아기들이 인생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환갑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앙코르 인생을 응원하는 현수막, 꽃과 케이크로 장식한 상 앞에서 친구들이 조바위나 복건이 아니라 왕관을 쓰고 환하게 웃었다. 그들은 모두 시간의 잔인함을 초월해 신을 만난 왕과 여왕 같았다.      

     

*우주로 날아가는 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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