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석탑
백제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왕과 귀족 사이의 세력 다툼으로 혜왕과 법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속절없이 죽임을 당했고 신라와 고구려는 호시탐탐 백제를 노렸다. 서동은 500년이 넘게 품위를 지키며 버티고 있는 이 나라를 지키고 싶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백제의 문화가 만개하고 백성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힘 있는 귀족은 왕을 갈아치우며 자기 주머니를 불리기에 바빴다. 그는 나라를 지키려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동은 금마저(익산)에서 홀어머니와 살면서 마를 캐서 내다 팔았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검은 용이라고 했다. ‘나는 용의 아들이다. 어진 용의 아들이 다스리는 세상에는 미륵이 오실 것이다.’ 그는 미륵이 내려오는 세상에서 진륜성왕이 되는 꿈을 품었다. 그러나 마를 파는 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신라로 넘어가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며 동요를 가르쳐주었다. 장단이 맞고 가사가 천하지 않으면서도 자극적이라 아이들은 재미 삼아 부르고 돌아다녔다. 금성(경주)의 장안에는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진평왕은 소문을 듣고 대로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셋째딸 선화공주. 그녀가 주인공인 향가는 듣기만 해도 남사스러웠다. 왕은 공주에게 사실 여부를 묻지도 않고 궁궐에서 내쫓았다. 서동은 계획대로 일이 되어가자 쾌재를 불렀다. 그는 쓸쓸하게 길을 떠나는 선화 공주의 길동무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샀다.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지혜가 빛나는 여자였다. 두 사람은 착실하고 현명하게 부와 덕을 쌓아 백제 귀족들의 환심을 샀다. 어리숙하고 무능한 왕에 지쳤던 그들은 ‘용의 아들’ 서동과 신라의 공주인 선화의 통치를 원했다. 똑똑한 왕이라 해도 권세가 등등한 귀족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성은 부여, 이름은 장(璋)이라고 불리는 백제 30대 왕이 된 서동은 신라를 맹공격했다. 선화의 고향인 신라를 적국으로 대하기 쉽지 않았으나 위대한 선왕 성왕이 신라의 노예 출신 대장 고도에게 죽임을 당한 원수를 갚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빼앗긴 땅을 다시 찾아야 했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승하하신 후 귀족들의 드센 간섭을 다스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불심을 돈독히 해서 그들 사이의 치열한 갈등을 잠재웠다. 고향인 금마저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선화와 함께 보지 않았던가. 그는 미륵 성전을 지을 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왕이 되기 전 신라의 공주와 결혼한 것처럼 가장 강력한 귀족 사택씨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과 혼인했다. 선화공주가 신라를 떠날 때 가져온 한 말의 금이 왕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고, 사택의 딸과 결혼해서 귀족과 연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고를 든든하게 했다.
이미 사비성을 증축했고, 위덕왕이 시작한 왕흥사를 완공했다. 이어서 미륵사를 세우고 금마저에 새로운 백제를 건설하는 왕궁터를 조성했으니 민심이 술렁일 만했다. 그러나 나라의 부흥을 간절하게 원하는 왕과 백성의 열정은 불타올랐다.
금마저의 미륵사는 세 개의 가람으로 계획했다. 보통 한 개의 금당 앞에 한 기의 탑을 쌓는 1가람으로 절을 세우지만, 이번에는 미륵 삼존불을 상징하기 위해 3가람으로 계획했다. 미륵사의 탑은 처음으로 돌을 이용해 목탑형식으로 9층으로 올렸다. 가운데 기둥을 쌓으면서 작은 구멍을 만들어 금제사리호와 절을 공양하는 사택왕후의 염원을 담은 금제 사리봉안기를 넣었다. 금판에 새겨 붉은 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난 사리봉안기를 사리공(舍利孔)에 넣으면서 왕후는 왕의 '수명이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하기를 기원했다.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각자의 기도를 담아 가장 소중한 물건을 바쳤다. 미륵사 한쪽에 있는 공방에서는 밤낮으로 장인들이 금, 은, 유리를 다루는 정교한 작업을 했다. 선화와 미륵사를 꿈꾸었지만. 사택왕후가 화려하게 마무리해주었다.
흑룡의 아들로 태어난 서동이 꾸었던 백제 부흥의 꿈이 거의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미륵사 창건이 무리한 역사였지만, 백제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했고 금마저에서 새로운 수도의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나라의 좋은 왕이 되고자 쏟아부은 기운이 과했던가. 사택왕후의 기도가 부족했던가. 641년 음력 3월 왕은 60세를 넘기고 쇠약해지더니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용맹했고 문화적 토대를 튼튼히 했고 백제의 위상을 높였다'고 시호를 무왕(武王)이라고 했다. 백성들은 위대한 왕과의 이별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당 태종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 그는 일본에서 공수해 온 금송으로 만든 관에 누워 미륵사지 곁의 거대한 능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백제를 수호하는 청룡이 되어 백마강에 머물렀다.
대전 친구들과 익산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미륵사지 석탑을 보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황량한 벌판에 반쯤 남은 석탑과 새로 세운 석탑이 천삼백 년 전 한 소년이 품었던 야망과 열정을 조곤조곤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쌍릉을 발굴하고 석탑을 해체해 유물을 발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의 흔적이 명확해졌다. 마를 캐는 소년이었던 소년 서동이 왕이 되고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노력했다는 증거도 분명하다. 가늠이 되지 않도록 긴 시간이 흘렀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