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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eyoonlee Oct 10. 2024

香聲

통도사 템플 스테이

통도사에서 마지막 밤. 우리는 깜깜한 산 밑의 암자에서 스님이 내려주는 차를 마셨다. 맞바람이 드나들게 만든 창으로 맑고 서늘한 산바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벽에 스님의 스승님이 써서 물려주셨다는 글과 글자가 액자에 고이 모셔 걸려있었는데 그중에 향성(香聲)이라는 큰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읽는 사람의 마음대로 뜻풀이를 한다고 스님이 선답(禪答)을 했다. 나는 절에서 머무는 동안 나의 몸으로 들어온 향기로운 소리와 소리가 들리는 향기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서체에서는 소리가 들리고 향기가 났다.

영축산은 1,379년(올해가 장율사 창건 개산대제 1,379주년이다) 동안 통도사를 지키고 있다. 1,000m 정상의 넓적한 바위가 강직한 스님의 머리처럼 보였다. 친구의 아들은 출가하여 통도사의 스님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에 ‘취직’한 친구 아들을 축하하며 우리는 그곳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등산할 때 절을 둘러보고 떠나기가 늘 아쉬웠는데 제대로 먹고 자면서 감히 불교의 진리를 엿보기를 기대했다. 거의 50년이 지나 소녀의 자취는 남아있을 리가 없지만, 나에게는 그때 그 모습만 보이는 옛날 친구들과의 여행이었다. 우리는 그때는 말할 수 없었던 사건이나 서로에 대한 기억을 자꾸만 이야기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우리가 머문 방 앞에 흐르는 계곡물이 밤새 함께 떠들어 주었다.

해가 뜨기 전, 그리고 해가 산 뒤로 넘어가는 쓸쓸한 시간에 절에서는 따뜻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회색 장삼에 자줏빛 가사를 입은 스님들이 한 분씩 나와 법고, 목어, 운판, 범종(불전사물)을 차례로 울렸다. 가죽으로 만든 법고는 땅 위의 만물, 목어(木魚)는 물속의 생물, 구름 모양의 운판(雲板)은 하늘을 나는 중생, 그리고 범종은 천상과 지옥의 영혼을 뜻한다. 차례차례 불전사물(佛殿四物)의 소리가 퍼지면 “불법의 진리가 중생의 마음을 울려 깨우친다.” ≪증일아함경≫에는 “태어나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묘한 울림의 소리를 듣고 구름처럼 모인다”라고 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의 존재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챙겨 그들이 모두 깨우치기를 바라는 지극하고 간절한 사랑이 소리를 통해 전해졌다. 우리는 사람이 만들었지만, 인공적이지 않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음(音)이라기보다는 울림이나 진동 같은 성(聲)이었다.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 자리가 비어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뒤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녁 예불이 열리는 법당에서 밤을 부르는 스님들의 독경 소리를 들었다. 15분 동안 몇 번인가 스님을 따라서 절을 하고 나오니 밖은 온통 깜깜한데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우리는 법당 계단에 앉아 어둠 속에서 울리는 처음 듣는 벌레의 합창 소리를 감상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숙소로 걸어오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으로 달콤한 향기가 들어왔다. 우리를 공양소로 안내하던 스님이 금목서, 은목서꽃의 향이라고 했다. 바람을 타고 향기가 만 리까지 가서 만리향이라고도 부른다. 주위에 꽃나무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만 리밖에 피어있는 꽃일까. 꽃향기는 바람이 없으면 전해지지 않지만, 덕행의 향기는 바람이 없어도 퍼진다고 스님이 말했다.

엄마를 바라보는 눈이 사랑으로 반짝이는 스님 아들은 우리를 데리고 영축산에 있는 암자 몇 군데를 구경시켜 주었다. 지장율사가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와서 처음으로 터를 잡은 장암에는 금와 보살이 있다고 했다. 큰 스님이 머무는 곳에서 감히 시끄럽게 울던 금개구리는 아무리 쫓아내도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은 암벽에 구멍을 만들어 개구리에게 들어가 있으라 했다. 믿거나 말거나 아직도 그 개구리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가서 보니 정말 커다란 바위 가운데 손톱만 한 구멍이 있고 그 속에 개구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모형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개구리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들 스님도, 그 엄마도 전에 몇 번 왔어도 금와 보살을 보기는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지장율사의 구도를 방해하던 개구리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서운암 뒷동산에는 금목서가 줄지어 피었다. 노랗게 다닥다닥 핀 작은 꽃을 만져 코에 대어도 바람에 흩어져 맡은 향기만큼 진하지 않았다. 꽃은 바람을 만나야 진한 향을 뿜어내는 것일까. 이름 모를 이쁜 새가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동산에 가득한 우아한 향기를 맡으며 우리는 오래 기다렸던 가을을 마음껏 즐겼다. 암자의 처마에 달린 풍경이 바람이 불 때마다 청아한 소리를 냈다.

절에서 이삼일 묵었다고 부처님의 지혜를 깨우칠 수는 없다. 보잘것없는 중생의 감각으로 들어오는 성스러운 향기와 소리를 통해 평화와 기쁨을 누릴 뿐! 스님의 고적한 방에서 보았던 향성(香聲)의 뜻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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