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이 끝난 겨울이었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병구완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풍채가 넉넉하고 건강했던 할머니는 까탈스러운 할아버지 뒷바라지가 힘이 들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장남인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우리는 갑자기 친가로 이사했다. 그래서 나는 5년을 다니던 학교를 떠나 다른 학교로 전학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낯섦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오히려 설렜다. 새로운 학교는 집 근처에 있는 사립 초등학교였다. 예전 학교처럼 걸어서 통학하는 학생보다 스쿨 버스를 타고 오는 학생들이 더 많아서 신기했다. 나는 집에 갈 때 버스를 타는 아이들을 부럽게 쳐다보았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편찮으신 시아버지를 모시는 시집살이를 시작하고, 동생은 새 학교에 자리가 없어서 이제는 멀어진 예전 학교에 다닌다고 정신이 없었다. 나는 ‘전학’이라는 큰 스트레스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철부지였다. 등교 첫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소개할 때 수많은 반짝이는 눈망울이 일제히 나에게 쏟아졌다. 반듯하게 옷을 입은 씻은 배추처럼 말끔한 아이들이 앉아서 한꺼번에 나를 쳐다보았다. 교실에 환하게 볕이 들어 눈이 부셨다. 그때야 만만치 않은 도전이 나에게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나는 어설프게 새로움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은 평범한 전학생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도 친절하고 관대했다. 어려움 없이 자란 아이들의 장점이었다. 덕분에 나는 다른 동네, 다른 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다 보내고도 새로운 곳에서 문제없이 1년을 보내고 중학생이 되었다. 그 학교를 졸업하면서 완전히 다른 동네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초등학교 6학년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과외를 많이 하던 시절에는 초등 동창이 모여 과외를 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비슷한 학교에 들어간 초등 동창을 만나 돌아다니며 놀았다.
시간은 뭉텅뭉텅 지났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만났다. 뭇 소녀들이 좋아했던 해사한 소년이나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던 소년, 그리고 그들을 보며 코웃음 치던 새침한 소녀는 이제 환갑이 되었다. 6학년 때 같은 반을 하지 않은 친구들은 알아보기 어려워도 교실 복도 어디선가 본 희미한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말간 어린이가 언뜻언뜻 보일 때마다 나는 전학 첫날의 짜릿했던 긴장의 순간을 떠올렸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혹은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를 하며 재미있어 죽는 모양이었다. 나는 함께 즐거워하며 들었다. 어머니 수업 참관 날에 한껏 꾸미고 오던 어머니들. 망사가 드리운 모자를 쓰거나 긴 머리를 휘날리며 세련된 차림을 하고 학교에 왔던 어머니들은 얼마나 젊고 우아했는지! 내 엄마가 제일 이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엄마들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이제는 편찮거나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간이란 참으로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회갑연’이라고 쓰인 플래카드, 우습지만 더 오래 살라고 실 꾸러미와 소나무 가지, 그리고 몇 가지 과일을 얹은 상 앞에서 우리는 초등학생처럼 천진하게 표정을 짓고 사진을 찍었다. 얼굴에는 훈장 같은 주름이 선명하고, 아무리 힘을 주어도 두둑한 뱃살을 감추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있는 대로 큰 소리를 내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의 촛불을 불었다. 촛불이 우리의 시간처럼 밝고 짧게 타다 꺼졌다. 심학산에 장어구이 식당을 차린 친구가 직접 구워주는 하얗고 통통한 장어가 지글지글 타면서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발랄한 복슬강아지가 같이 놀고 싶다고 마당 구석에서 짖어대는 소리가 밤을 환하게 밝히는 노란색 전구 아래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