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산업 창업자 이석구
나의 큰할아버지 이석구는 단기 4280(서기 1948)년 7월 25일 대림산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현재 회사명이 DL이 된 대림산업에서 창업자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조명이 꺼진 긴 터널 같았던 시대에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한평생 큰 사업을 이룬 한 인간의 욕망과 욕망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그가 지은 이름 ‘큰 숲(大林)’처럼 선명하다.
군포 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면서기관으로 일하고 있던 석구씨는 일을 하면서도 늘 새로운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동생 순구 씨가 요양차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그들의 앞선 문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유심히 들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동생을 배웅하러 수원역에 가서 어리둥절한 동생에게 여권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부산행 기차를 탔다. 형제는 외모가 비슷해서 형은 동생의 여권으로 일본행 배를 탈 수 있었다. 거의 백년 전 세상은 참 어리숙했다.
일본어를 잘했지만,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조선인 청년으로서 받았을 차별과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하지만 그는 동경의 서점에 취직하여 성실하게 일했다. 주인이 그를 사윗감으로 인정할 정도였다. 브라질로 이민 가려는 꿈을 가졌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접었다. 브라질에 갔었더라면 그에게는 평행 우주처럼 다른 세상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는 5년 동안 낮에는 서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신문물을 배웠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와 부인 등 가족을 잊을 수는 없었다. 일찍 혼자 된 어머니, 안동권씨 부인, 그리고 일가친척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다. 고향 원리, 볌실에서 그들은 모두 한 가족처럼 지냈다. 석구 씨에게 고향은 자신을 이루는 전부이고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그는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석구 씨는 금의환향했다. 어머니는 미싱 같은 진기한 물건을 가지고 돈을 벌어 돌아온 아들을 보고 기뻤지만, 그동안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다시 가면 안 된다고 매를 들면서 무섭게 꾸짖었다. 서울에 장사하러 떠났던 남편은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는가. 5년 만에 아들을 본 어머니는 그를 다시 일본에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석구 씨는 예전처럼 면서기로 일했다.
그러나 석구 씨의 욕망은 면서기로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식견 있는 대학 교수의 조언을 듣고 그 당시 신흥 산업 도시로 부상하고 있는, 고향과 가까운 부평에 목재상 ‘부림상회(富林商會)를 시작했다. 목재뿐 아니라 철물, 벽돌 등 건축 자재 유통업이었다. 그가 그동안 보고 익힌 경험과 신문물에 대한 안목으로 사업은 번창했다. 그리고 석구 씨는 손수 소달구지를 끌며 일하고, 직원의 대소사를 세심하게 챙겼다. 그는 사업은 대담하게 벌였지만, 성격이 자상해서 주변 사람을 꼼꼼하게 살폈다.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도 알 정도였다.
사업이 커지면서 자금이 필요해 여동생의 남편 원장희 씨와 외숙부 이규응 씨의 출자를 받았다. 원장희 씨는 출자만 하고 이규응 씨는 둘째 아들 이재준 씨의 참여를 원했다. 자금이 풍성해지자 사업은 더욱 커졌다.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만 수탈당한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산, 그 당시에는 울창했던 숲을 그들은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강탈했다. 대부분의 산림 채벌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은 어린나무를 보호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었다. 석구 씨는 아끼는 고향의 산, 팔달산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이 산의 채벌권을 따내었다. 일본의 전쟁 사업을 도왔으니 친일파라고 어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일본의 압제와 불평등한 처우를 딛고 일어나 우리 민족의 사업 발판을 세운 최초의 기업가였다.
해방의 기쁨은 컸다. 하지만 전기나 지하자원은 북쪽에 치우쳐 있었고(南農北工 정책) 일본인은 자본과 기술을 독점하다가 떠나버렸기 때문에 경제는 어렵고 사회는 어지러웠다. 그들이 남긴 탄압과 폭정의 잔재는 민심마저 흩트려서 부림상회는 폭풍 속의 작은 배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석구 씨는 직원들에게 자유를 찾은 나라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며 사기를 북돋웠다. 그리고 노사는 뜻과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했다.
미군정이 시작되자 국가시설을 위한 토목 공사를 벌였고 학교와 주택이 많이 필요했다. 북쪽에 있던 목재 사업장을 빼앗겨 손실이 막대했지만, 경기도의 야산에 남은 벌목을 불하받아 공급했다. 불씨를 꺼지지 않고 타오르게 한 석구 씨의 노력과 집념으로 부림은 재기했고 상호를 ’대림‘이라고 바꾸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고 영암선 (영주~철암 간 86.4km의 철도 노선) 건설 수주를 맡게 되면서 대림은 진정한 토건업 회사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수리 간척 사업, 경복 중학 등 교사 건설, 군 관련 공사 등 그 당시 우리나라의 수많은 건설 현장에 대림이 있었다.
조금씩 일제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나라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사업은 차치하고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 참혹한 전쟁이었다. ‘악질적인 반인민적 사업가’라고 매도당해 인민군에게 잡혀갔던 석구 씨는 사업하다가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살아났다. 9.28 서울 수복 후에는 ‘적색분자’라고 미군에게 끌려가 죽을 뻔한 어이없는 일도 일어났다. 전쟁은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그의 사업에 대한 의지는 꺼지지 않았다. 부산 피난 중에는 피난민 수용소를 비롯하여 각종 공사를 맡았다. 위기는 그에게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전후 복구 사업을 성실히 진행하면서 대림이 진정한 큰 숲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석구 씨는 자산가가 되었어도 봉투 한 장도 절약할 만큼 검소하고, 어려운 일가친척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돌보았다. 어렸을 때, 집안의 어르신 생신이 되면 아버지의 고향 사람들은 서울로 와서 며칠씩 지내다 갔다. 할아버지 생신 즈음이면 얼굴이 다 비슷해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른들이 방마다 가득했다. 서울에서 자란 나는 고향 공동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큰할아버지의 사업장에서 함께 일했고 도움을 주고받던 한식구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석구 씨는 가족이나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점을 간파하고 살려 주었다. 큰 조카인 나의 아버지는 대학 졸업 후 그분 덕분에 독일에서 유학할 수 있었다. 큰할아버지가 자주 격려 편지를 보내 주었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언제나 큰아버지에 대해 애틋함과 그리움이 가득하다.
그는 우리나라 건설업의 선구자였다. 대림에 이어 현대건설, 삼부토건 등 다른 건설회사가 생겨났다. 건설업 외에도 증권시장의 대중화를 이룬 서울증권, 명보극장, 금강산업 등 사업의 발을 넓혀 입지를 단단하게 다졌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울고 올라가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혹은 “쉴 사이 없이 가야 할 몸이기에 구슬픈 육체”* 이었던가. 동생의 죽음과 사업장의 화재로 충격을 받고 스트레스가 많았던 큰할아버지는 조금씩 병들었고 병세는 점점 심해져 결국 사업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8여 년의 투병 생활 끝에 큰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취업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책 ≪이석구, 영원한 카리스마≫를 빌려와 읽고 있었다. 책 속에는 내가 자라면서 자주 듣던 큰할아버지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인생이 생생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조선 선조 인성군의 후손으로 출가해 일찍 혼자 되어서 자식을 키우느라 콩 하나도 아끼고 소처럼 일했던 증조할머니, 큰할아버지의 손 큰 사랑 때문에 군식구가 끊이지 않아도 묵묵하게 자기 일을 했던 안동권씨 큰할머니, 일본을 가려다 역에서 형에게 여권을 빼앗겼지만 늘 형을 믿고 따르던 우리 할아버지 이순구, 임금이 담긴 현금 가방을 기차를 타고 가서 영주 공사장까지 전달하라는 백부님의 부탁을 듣고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대학생이었던 아버지, 이름이 ‘필’자로 시작하는 고모, 삼촌들, 귀에 익은 고향 원리 볌실 아저씨들의 이름. 그리고 혼란한 시대가 일으키는 바람이 모질게 불어 바다를 삼킬 듯해도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솟구치는 파도처럼 일어나 사업을 일으키고 사람을 도운 큰할아버지 이석구. 나는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가슴이 벅차게 뭉클해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든 시대라고 투덜거려도 그분들이 살아온 그때 그 시절의 고통을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큰할아버지의 꺾이지 않는 의지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선한 마음으로 쌓아 올린 탑의 그림자는 우리에게 깊게 드리워져 있다. 얼마나 잘 살아야 그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을까.
역사의 기록은 승자 중심이라 안타깝게도 창업자의 발자국은 거의 지워졌다. 그러나 나의 큰할아버지가 세상에서 품은 욕망과 결실이 남긴 업적이 세상을 이롭게 하고 사람을 잘 살게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지리멸렬한 삶의 가운데에서 가까운 조상의 열정적인 삶을 마주하고 용기를 얻었다. 늦었지만 그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고맙습니다. 큰할아버지.”
*김수영 시 ‘구슬픈 육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