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내 이야기

고향

아버지의 고향 볌실

by Claireyoonlee

우리는 아버지의 고향을 ‘볌실’이라 불렀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수원 근처의 작은 마을이다. 발음이 어렵고 도무지 뜻을 알 수 없어 아버지에게 물었더니 ‘밤골’이라고 했다. 정몽주의 사위였던 조상 중 한 분이 조선이 건국된 이후 박해받고 쫓겨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고 아버지가 또 말해 주었다. 볌실은 실로 오랫동안 이씨 집안의 집성촌이었다.


아버지는 요즘도 고향에 성묘하러 가서 아직 그곳에 사는 얼마 남지 않은 나이 든 친척들을 만나 옛날이야기를 나눈다. 어렸을 때, 볌실에 가면 그들은 나를 보고 “ㅇㅇ 딸은 ㅇㅇ를 꼭 닮았구나”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러면 나는 예쁜 엄마를 닮았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뾰로통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장사하러 서울로 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조선 선조의 서7남 인성군의 후손인 증조할머니는 허리띠를 바짝 조여 매며 살림을 꾸렸다. 증조할머니의 절약 비화는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조반석죽(早飯夕粥) 자식들에게 아침에는 밥, 저녁에는 죽을 먹였다. 일해야 하는 아들에게는 충분히 먹였고, ‘아무 소용 없는’ 딸에게는 밥을 덜 주었다. 아들들에게는 참외 속살을 주었고, 이 집안의 딸들은 참외껍질만 먹었다고 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편 없이 살아내야 했던 증조할머니의 고육책이었겠지만, 고모들은 요즘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주 분하다고 했다. 그 덕분인지 집안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다.

언제부터인가 볌실은 공업 단지로 어중간하게 개발되어 상상하기 어렵지만, 거의 100년 전 이곳은 개울에 물고기가 지천인 청정한 농촌이었다. 아버지는 고기를 잡는다고 채반을 몰래 가지고 나가 망가뜨려 자린고비 할머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채반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놀러 다니던 아버지는 철이 들고 서울에 있는 명문 상급학교에 가기 위해 억척같이 공부했다. 식구가 많아 집중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서 비어있는 닭장을 공부방으로 만들었다. 아흔이 되어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아버지의 성실함은 빈 닭장에서 시작되었나 보다. 지금도 작은 방에서 골똘하게 연구하는 아버지는 열악한 환경에서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던 소년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아버지는 결국 원하는 학교에 합격했다. 그리고 다른 동생들까지 서울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고 같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났다. 어른들은 열다섯 살 난 큰아들에게 집을 보라고 하고 동생들을 데리고 피난을 갔다. 아무도 그렇게 심각한 전쟁일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용감하게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버지를 때려 쓰러뜨렸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밖에 인민군이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기지를 발휘했다. 용변을 보겠다고 하고는 슬쩍 나와서 감시를 피해 고향을 향해 도망쳤다. 캄캄한 새벽이었다. 용의주도하게 흑설탕 한 봉지와 그 당시 학생으로서는 재산 목록 1호인 영어 사전을 가방에 챙겼다. 전쟁은 참혹했다. 길에는 시체가 널려있었다. 잡히면 죽임을 당하거나 의용군으로 잡혀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무서웠어.” 하며 지금도 그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 얼굴이 잠시 얼어붙었다. 머리가 파릇한 고등학생이 서울에서 수원까지 100리가 넘는 길을 걸으면서 얼마나 무서웠을지 나는 가늠할 수 없다. “발이 다 부르트고…”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강 다리는 한창 전투 중이었다. 그래서 뚝섬으로 가서 나룻배를 얻어 타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 배가 고프면 아직 피난을 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집에 들어가 밥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학생 모자를 쓴 아버지에게 밥을 선뜻 내주었다. “배가 고팠지만, 긴장되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어.” 하면서 아버지의 얼굴이 다시 겁에 질린 소년이 되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수원의 친척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30리 길을 또 걸어 볌실에 왔다. 그 후 몇 달 동안 인민군은 고향까지 쳐들어왔다. 그들의 만행을 이야기하며 아버지는 지금도 치를 떤다. 집에 있는 감나무에 열린 열매를 다 세어두고 따먹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는 곡식 낱알 수도 세어두었다가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곤욕을 주었다. 또 군대에 끌고 갈 젊은 남자를 잡는다고 혈안이 되어 돌아다녔다. 아버지를 숨겨준 사람은 동네 어른들이었다. 천장을 뚫어 다락방에 숨어있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우거진 콩밭에 숨었다. 고향 사람들은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청년들을 온 힘을 다해 지켰다. 평소에 가족에게는 인색했지만, 어려운 친척에게 잘 베풀었던 증조할머니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사실 서울에 있던 아버지의 친구 중 절반 이상은 의용군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는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과 친척 동생들을 지켜준 고향 어른들이 고맙다고 했다.


아버지가 고향과 전쟁, 그리고 그 세대가 고생했던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는 드라마나 소설보다도 가볍게 생각했다. 어떤 때는 반복되는 이야기가 지루해 듣는 척만 했었다. 하지만 나의 삶은 아버지의 삶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자랐으며, 그 단단한 어깨 위에서 내 아이의 미래도 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가 도망치지 못했다면, 모르는 사람이 밥을 주지 않았다면, 고향 사람들이 숨겨주지 않았다면 ……

다음 추석에는 아버지와 함께 볌실을 찾아가야겠다. 내 존재의 근원이기도 한 아버지의 고향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