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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금현 May 13. 2024

빨간 원피스-3장

박송운의 네 번째 첩이 된 선희는, 남자가 사준 서울 강남의 육십 평 대 최고급 빌라에서 혼자 살았다. 첫날 밤, 남자는 하얀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선희는 들뜬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고, 그 속에는 빨간 원피스가 있었다. 등 뒤에서 지퍼로 잠그게 되어 있었고, 허리 부분에 들어간 가느다란 하얀 선이 허리 라인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선희는 빨간 원피스를 걸친 자기 자신을 파우더룸 거울에 비춰보았고, 거기에서 진짜 자신을 발견하였다.

박송운이 일주일에 한 번도 오고 두 번도 오면, 그 즉시 선희는 가정부를 퇴근시켰다. 단 둘 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다음, 선희는 침대에 누워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를 한참 쳐다보곤 했었다. 왜 아이가 안 생길까? 선희는 미래를 볼 줄 아는 여자였으니까. 아이가 없으면 언젠가는 이 생활이 끝나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첩이면 어때? 그건 내 맘이고. 아이가 있어야지 이 남자의 재산을 조금이라도 물려받을 텐데…….

그러나 하늘은 선희에게 여자로서 가지고 싶은 모든 것들을 주는 듯 싶었지만, 결코 하나는 주지 않았다. 아이. 선희는 임신 클리닉도 다녀보고, 한약도 먹어보고, 용하다는 절에 가서 돌부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절도 천 번씩 하곤 했었다. 그러나 삼 년이 지나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한 점은, 남자였다. 박송운은 선희에게 임신의 임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 점이 선희는 정말로 이상했다.

“저, 왜 임신이 안될까?”

선희는 송운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려보았다.

“어, 임신? 애를 원했어? 난 몰랐는데.”

선희는 남자의 품에서 빠져 나와 침대 위에 앉았다.

“오빠! 나도 여자야. 당연히 애를 원하지.”

송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그건 몰랐네. 나 수술했어.”

송운은 담담히 말했고, 선희는 그제야 이 남자의 진실을 알았다. 그리고 남자에 대한 사랑이 사라져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돈이었지만, 이제 그것도 선희의 손가락 사이에서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오빠, 그럼 나 어떡해?”

“뭘?”

“그냥 이대로 나이만 들어야 해? 나중에 칠십 팔십 먹도록 혼자 있어야 해?”

그러나 송운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본처와의 사이에 2 녀를 둔 송운은, 본처와 이혼했다. 그리고 새로 맞아들인, 그러나 교통사고로 죽은, 첫 번째 첩에게서 얻은 2 남까지 데리고 사는 송운은, 그러니까 2 남 2 녀를 가진 남자는 더 이상 자식 욕심이 없었다.

더구나 아주 안 좋은 소식은, 남아 있는 두 번째 첩과 세 번째 첩, 그리고 자기까지의 시간 간격이 삼 년이라는 점이다. 조금 있으면 다섯 번째 첩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똑똑한 선희는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 자신이 찬밥으로 만든 세 번째 첩처럼, 자신도 다섯 번째 첩에 의해서 뒷방 신세가 될 것이 뻔했다. 지금은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들르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한 달에 두 번이 되었다가 한 번으로 줄 것이고, 그러다가 세 달에 한 번이 되고…….

선희는 그날이 생각났다. 신촌의 거리에서 마이바흐를 만난 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 이 남자를 따라서 차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송운은 선희를 빤히 보더니, “심심하면 밖에 나가서 즐겨도 돼.” 라고 말했고, 선희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바로 위 두 명의 첩들은 다들 이혼녀였고, 그래서 자기 자식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두 명의 첩들은 나이가 사십 초반과 삼십 중반이어서, 자기 자식들을 키우면서, 가끔씩 오는 남자에게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박송운이 돈을 충분히 주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스물다섯이 끝나가는 선희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밖에 나가서 즐기라는 말은, 이제 네 갈 길을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오빠! 내가 오빠를 두고 어딜 가겠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

송운은 서서히 잠이 들었으나, 선희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선희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데를 다녔지?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 이 삼 년 된 것 같기도 했고, 이 삼십 년 된 것 같기도 했다.

앞에서 쇼를 하는 젊은 남자의 벗은 몸을 보면서, 선희는 양주 한 잔을 마셨다.

“야, 너, 왜 그래?”

선희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너, 이상하다. 오늘따라 왜 그래?”

선희의 옆에 앉아 있는 이쁘장하게 생긴 남자애가 선희의 잔에 술을 채웠다. 선희는 그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선해 보였다. 갑자기 호기가 생긴 선희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친구들을 보았다.

“내가 계산할 테니까 더 놀아.”

두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왜, 가려고?”

선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서 시중 들던 남자애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두 친구들은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야, 백선희, 너 오늘 필 받았구나.”

선희는 남자애의 귀에 속삭였다.

“너, 누나가 좋으니?”

젊은 남자는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된 선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선희의 미모는 그만큼 대단했으니까.

고개만 끄덕이는 남자애를 앞장세우더니 선희는 룸을 나섰다.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면서, 젊은 남자애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선희를 본 술집 사장은 고개를 구십 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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