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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금현 May 10. 2024

빨간 원피스-2장

그렇게 도도했던 선희였으나, 드디어 선희도 임자를 만나고 말았다. 하루는 신촌을 거니는데, 혼자서, 선희는 그때 남자가 없었으니까, 이제 주머니가 두둑하지 않은 남자들과 만나서 시간 보내는 것도, 선물이랍시고 별 것도 아닌 거 받고 호텔 방에 들어가 헐떡거리는 것도 이제는 시들해진 그런 무렵, 선희의 눈앞에 마이바흐 62S가 나타났다.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에 파티션이 있어서, 뒤에서 무슨 짓을 해도 모르는 그런 차량 말이다. 선희 역시 웅장한 마이바흐를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체 저 차에 타고 있는 남자는 누굴까? 그때 마이바흐가 선희의 옆에 서더니, 뒤 창문이 서서히 내려갔다. 선희는 갈 길을 계속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벌써 느낌이 왔던 것이다. 이건 나한테 온 기회야. 선희는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는 척 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아무 아이콘이나 눌렀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뒷문이 열리더니 남자가 내렸다. 쫙 빠진 검정 수트를 걸친 그 남자. 선희가 척 봐도 돈깨나 있어 보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남자는 차문을 닫더니, 선희의 곁에 섰다. 그러더니 선희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선희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제 말을 걸어올 때가 됐는데…….

선희의 예상은 절대로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실례합니다.”

선희는 깜짝 놀란 척,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하면서, 무릎을 살짝 굽혀 스마트폰을 잡는 척을 했고, 남자는 정말로 깜짝 놀라, 선희의 스마트폰을 잡는다는 것이 그만 선희의 손을 잡고 말았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신촌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선희와 마이바흐의 남자만 빼고 모두 그 자리에 멈춰선 것만 같았다. 선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서 선희는 돈 냄새를 맡았다.

“감사합니다.”

진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선희는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 감사는 남자의 가슴을 비수처럼 쿡 찔러 버렸다. 일순간 남자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러면 곤란해. 말을 해야지.

선희는 답답해졌다. 남자에게서 슬며서 손을 뺐다. 그러나 남자는 아직도 말을 안 했다.

“감사합니다.”

젠장, 내가 한 번 더 말해야 해?

그제서야 정신이 든 남자는 선희를 찬찬히 보더니 입술만 달싹거리며 어색한 손짓을 했다. 남자는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왔지만, 선희는 앞서 나갔다. 남자에게 입을 열 기회를 줘야 해.

“예? 뭐라고요?”


“시간이 되면……. 차라도 한 잔…….”

진짜 팔십 년대에나 들어볼 듯한 멘트였다. 그러나 남자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선희가 보기에도 남자는 오십 대 중반은 되어 보였으니까. 그러나 옷차림새는 젊은 놈팽이들이나, 대기업에 다니는 과장, 부장들보다도 훨씬 나았다. 의사? 판검사? 아냐. 의사나 판검사들은 이렇게 못 입어. 패션 감각이 없거든. 선희가 만나본 의사들은 하나같이 선희를 무슨 의학 실험용 인체로 생각들을 하는지, 밤새도록 들여다보았고, 판검사들은 선희 앞에서 그저 거들먹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의사나 판검사 양쪽 다, 돈을 내야 할 때가 되면, 얼굴빛이 새하얘지면서 손을 벌벌 떨곤 했다. 그나마 의사는 돈이 좀 있으니 나았지만, 판검사들은 월급쟁이들이라서 그런지 정말로 벌벌 떨었다. 그러면 선희는 가차 없이 바로 이별을 고했다. 아니, 이별을 고한 것도 아니다. 그냥 전화를 안 받거나, 자꾸 걸리적거리면 바로 차단을 해버렸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선희의 앞에 짠하고 나타난 남자는 그들과 질이 달라 보였다.

“예?”

여기서 덥석 물면 안 돼. 백선희. 참아라.

“제 차로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싶군요.”

이제 남자는 완전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말이 자연스러워졌다.

“예? 그치만…….”

선희는 이 ‘그치만’이라는 표현을 아주 좋아했다. 이건 승낙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절도 아닌 아주 좋은 멘트였으니까. 그치만……. 이렇게 하고 뒷말을 흐리면 남자는 달아오르게 마련이었다.

남자는 아르마니 수트 안주머니에서 프라다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명함을 한 장 뽑았다.

“이거 제 명함입니다.”

선희는 명함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걸 읽어보았다.

[XX 주식회사

대표이사 박송운]

선희도 아는 회사였다. 아, 이 남자가 가끔씩 연예 통신에 나오는 그 남자구나. 백선희, 너 오늘 임자 만났어.

“아, 저도 이 회사 알아요.”

이제 더 이상 밀고 당길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더 하면, 아마 이 남자는 포기하고 갈 것이다. 선희가 회사를 안다는 말에, 남자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는 마이바흐에 손짓을 했고, 그러자 운전석 문이 열리며 기사가 나오더니, 선희를 차 뒤로 안내했다. 선희는 운전사가 열어주는 뒷좌석에 탑승했고, 박송운은 선희 옆에 탔다. 파티션이 내려가 있었다. 남자는 선희를 보더니, 버튼을 눌러 파티션을 올렸다. 투명한 유리창이 올라가더니, 바로 뿌옇게 흐려졌다.

“어머, 정말 신기해요.”

남자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차는 출발했고, 선희는 뒷좌석에 살포시 기댔다. 남자의 눈이 선희의 다리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훑어서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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