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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금현 May 24. 2024

빨간 원피스-5장

엄마는 집에 오겠다는 선희의 말을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 아마 남자가 집에 와 있는 모양이다. 그래. 내 집으로 가자. 현수도 친구 만난댔으니까. 선희는 집에서 혼자 조용히 쉬고 싶어졌다.

병원 진료가 힘들었을까, 선희는 몸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힘든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서 집으로 향했다. 집이라야 스무 평도 안 되는, 열여덟 평짜리 자그마한 아파트, 그것도 월세로 들어있는 집이다. 선희는 예전에 살던 육십 평대의 그 빌라가 가끔씩 생각이 났다. 도우미가 날마다 와서, 청소며 빨래며 음식이며 전부 해놓고 갔었다. 선희는 박송운이 준 돈으로 쇼핑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여기저기 놀러도 가곤 했었다. 그러나 절대 다른 남자는 만나지 않았다. 걸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선희는 자기가 절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자기가 절대 예측하지 못한 방법으로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 때문에, 다 잡은 물고기가 그물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선희는 어깨에 메고 있던 싸구려 분홍 핸드백에서 집 열쇠를 꺼냈다. 찰칵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돌아갔다. 그때는 카드만 대면 됐었는데.

문을 조용히 닫은 선희는 자신의 신발을 보았다. 예전에 신던 그 비싼 신발들이며 옷들을 전부 그 빌라에 버리고 왔기 때문에, 선희는 모든 것을 다시 사야만 했고, 최대한 싼 걸로 샀다. 흙이 묻고 옆에도 흠집이 난 신발. 선희는 그 신발이 자신인 것만 같았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선 선희의 귀에 자그만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뭘까? 선희는 침실로 향했다. 하나밖에 없는 침실로. 문이 닫혀 있었다. 걸쇠는 걸리지 않은 채. 싸구려 아파트는 그랬다. 문이 닫혀 있기는 하나, 걸쇠가 슬쩍 걸쳐진 그런 상태가 흔했다. 선희는 살짝 문을 밀었고, 문 틈 사이로 침대가 보였다. 문이 열리자 여자의 신음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선희가 덮고 자는 하얀 이불이 침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문을 조금 더 밀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젊은 남자의 엉덩이가 보였다. 낯이 익은 엉덩이. 그 옆에 벌거벗은 여자의 두 다리. 매끈했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채, 침대 위의 두 사람은 꼭 껴안고 격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여자에게서 고양이 소리가 났다. 몇 초 정도 쳐다보다가, 선희는 조용히 방문을 당겼다. 그러나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실로 나온 선희는 식탁 위에 두었던 핸드백을 걸치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그제야 자신의 신발이 아닌 처음 보는 여자용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바탕에 분홍색 나이키 로고가 선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선희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문을 열고 나간 선희는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다시 잠궜다.

세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최세나! 어디 가서 이런 예쁜 원피스를 단돈 이만 원에 사겠어? 종이 백에 들어있는 원피스를 보면서 세나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지하철을 타려고 계단을 내려간 세나의 눈에 화장실이 보였다. 그래, 저기서…….

세나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비어 있는 칸에 들어간 세나는 갑자기 여고시절이 생각났다. 학교 끝나면 친구들하고 어울려 지하철 화장실에서 교복을 벗은 다음, 젊은 여자들이 입는 블라우스와 짧은 치마로 갈아입곤 했었다. 그 다음 화장실 거울을 보면서 입술에 립스틱을 칠했었다.

이 모든 추억이 세나를 웃게 만들었고, 세나는 미소를 지으며 종이 백에서 원피스를 꺼냈다. 문 안쪽에 달려 있는, 옷을 걸 수 있는 걸쇠에 원피스를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고 있던 티셔츠와 청바지를 벗어 종이 백에 넣었다. 원피스를 머리 위부터 입은 세나는 치맛단을 펴며 미소를 지었다. 화장실 칸을 나간 세나는 거울을 보며, 빨간 립스틱을 꺼냈다. 여고시절, 그때처럼 입술에 공들여 립스틱을 바른 세나는 뒤로 돌면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그리고 만족했다.

선희는 무작정 걸었다. 아파트 정문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구멍가게도 지나고, 자그마한 식당도 지났다. 횡단보도도 건넜다. 세상 모든 것들이 선희에게 낯설어 보였다. 선희가 살던 세상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어디에서 살다가 여기에 떨어졌을까? 저 앞에 지하철역이 보였다. 갑자기 지하철이 타고 싶어진 선희는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하철 계단 아래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올라왔다. 빨간 원피스를 입은 그 여자는 선희를 지나쳐 갔다. 그 자리에 멈춰 서 뒤를 돌아본 선희에게, 그녀의 등이 보였다. 목에서 허리까지 수직으로 이어진 지퍼가 보였다. 바로 그 아래 하얀 선이 수평으로 가느다랗게 허리께에 들어간 빨간 원피스. 선희의 기억이 춤추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여자, 처음 본 여자, 처음 본……. 선희는 내려가던 계단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계속 앞으로만 걸어갔다. 오른쪽으로 인도가 휘어졌다. 선희는 그 여자를 따라갔다. 저 앞에 시장이 보였다. 그 앞의 약간 넓은 공터에 포장마차 몇 개가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서 가는 여자가 포장마차들을 지나쳤다. 선희도 포장마차 옆까지 왔다. 포장이 벗겨진 포장마차 위에 음식 재료들과 주방 기구들이 있었다. 선희는 그것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몰랐다. 그냥 그걸 집어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선희는 앞을 보았다. 여자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선희는 그쪽으로 다가가, 여자의 뒤에 섰다. 눈을 들어 신호등을 보니, 빨간 색이었다. 선희는 기다렸다. 빨간 신호등일 때는 건너가면 안 된다. 멈춰야 한다. 이윽고 신호등이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뀌었다.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한 발을 내디뎠고, 그 순간 선희는 핸드백에서 주방 칼을, 방금 전 포장마차에서 집어온 식도를 꺼내 빨간 원피스의 여자 등을 푹 찔렀다. 칼날 밑으로 원피스보다 더 빨간 피가 흘러 내렸다. 선희는 칼의 손잡이를 놓았다. 여자의 등에 그대로 박혀 있는 칼. 빨간 원피스의 여자가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선희의 눈앞에서 도로의 포석이 빙그르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찔렀습니까?”

“……”

“그게 당신 옷이어서 그랬습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그건 나였어요!”

“뭐라고요?”

“……”

선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고, 선희의 앞에 앉은 경찰관은 혀를 끌끌 찼다.

“이봐요, 백선희 씨! 이제 그 옷은 당신 것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설혹 그런다고 해도, 그렇게 사람을,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을 칼로 찌르다니…… 당신, 제 정신입니까?”

선희는 제 정신이냐는 젊은 경찰관의 말에,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삼십 대 초반의 얼굴이었다.

“나, 예뻐요?”

선희의 뜻밖의 질문에, 경찰관은 한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나, 가지고 싶어요?”

이제 경찰관의 얼굴은 빨개지다 못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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