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장.
준영은 자기의 조그마한 원룸에서 여행용 가방 하나와 백팩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 속에는 몇 가지 필요한 것들, 그래봐야 옷가지들과 신발 몇 켤레 그리고 잡다한 소품 같은 그런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준영이에게는 귀중한 짐이었다.
빌라 앞에서 기다리던 진영은 준영의 여행용 가방을 열어보더니 , 준영이 가지고 온 이런저런 물건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건 챙기고, 저건 버리고 등 몇 가지 지시를 했다. 특히 준영이 가지고 온 옷가지들은 대부분 버려졌다. 그러나 진영은 준영에게 신경도 안 썼다.
“형, 이것도 버려.”
“그래. 알겠다.”
휙 하고 던져지는 자기의 셔츠들과 바지들을 보면서 준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비록 양부모이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인 사람들이 사 준 것들이었다.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 되어 버렸고, 벌써 양부모를 안 본 지도 몇 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가끔씩 선경이를 통하여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형, 그거, 그것도 버리지. 내가 하나 사줄께.”
“응? 뭐?”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준영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거, 손목에 차고 있는 거. 시계 말이야.”
준영은 진영의 채근에 자기의 손목을 들어 보였다.
“이거?”
진영은 준영에게 다가오더니, 손목을 잡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오리엔트? 야, 이런 구닥다리를 차고 다닌단 말이야?”
준영은 잡힌 손목을 거칠게 빼냈다. 그의 눈에 화가 떠올랐다.
“왜 그래? 뭐 중요한 거야?”
“그래. 이건 안돼.”
“마음대로.”
진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금방 다른 물건들을 보기 시작했다.
‘이건 선경이가 준 거란 말이다.’
“다 끝났다. 이제 술 한 잔 하러 가자.”
진영은 쾌활하게 웃으며 준영에게 말했다.
“그래. 그런데 낮부터 술이냐?”
진영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그 눈이 점점 웃어갔다.
“왜 이러셔? 그래도 조직에서 놀던 분께서…….”
준영은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진영은 친동생이다. 진영의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집에 가고 싶다.’
생활이 바뀌어서,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어진 것일까? 준영은 왠지 그런 마음이 들었다.
* * *
최선경은 아파트 공동 현관 문 앞에서 카드키를 꺼내들었다. 그걸 터치 스크린에 대자 현관 문이 열렸다.
“선경아.’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선경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에서 반가운 사람을 발견했다.
“오빠!”
선경은 뒤로 돌아 뛰어갔고, 준영은 그런 선경을 안았다.
“잘 지냈어?”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선경은 준영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봤다.
“오빠는 어떻게 지냈어? 택배도 그만 둬 버리고. 아차, 택배.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난처했는데…….”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선경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런데, 여기는 왜 왔어?”
준영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엄마, 아빠 보려고.”
선경은 아파트 현관을 열고 들어가 신발을 벗더니 중문을 살짝 밀었다.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고 보니, 최종환은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고, 송순화는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빠, 나 왔어.”
종환은 리모컨을 놓더니, 선경을 바라보았다.
“어서 와라.”
다음 순간 종환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왔다.
“준영아!”
종환은 한달음에 달려와, 중문을 열어제치더니, 선경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준영의 얼굴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이 소리에 순화도 주방에서 달려왔다.
“아이고, 준영아!”
준영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 아버지,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순화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면서, 그녀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준영을 감싸 안았다.
“아이고, 이놈아, 대체 어디서…….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이놈아…….”
종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고, 이 모습을 보고만 있던 선경도 가늘게 흐느꼈다.
“그래, 그동안 뭐했냐?”
종환의 질문에 선경이 끼여들었다.
“아이참, 아빠도. 뭐하기는? 내가 택배 소개시켜줘서, 그거 했다니까.”
“선경이는 가만 있어라.”
종환의 말에 선경의 입이 쑥 들어가버렸다. 순화는 옆에서 준영의 앞에 연신 반찬을 가져다 놓고 있었다.
“준영아, 이거 좀 먹어봐라.”
“예, 엄마.”
준영은 입에 먹고 있던 밥을 꿀꺽 삼키더니, 마음을 정한 듯 말을 꺼냈다.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키워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순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준영아, 우리는 부자지간이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종환은 낮은 목소리로 준영을 꾸짖었다.
“그럼, 이제 여기서 살 거지?”
순화는 준영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엄마, 아니요.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준영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종환은 숟가락을 식탁에 올려 놓았다. 준영에게서 비장함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말해 보아라, 준영아.”
준영은 종환의 말이 끝나자,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래 가지고, 지금은 진영이 집에 들어 갔습니다.”
종환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고, 순화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오빠, 이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 친동생하고 있으니까 좋아?”
준영은 선경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끄덕끄덕했다.
“응, 좋아. 뭐라 설명하긴 힘든데, 그냥 마음이 편해.”
준영은 다시 종환을 보며 말했다.
“아빠, 당분간 거기서 살래요. 그리고 여기는 자주 올게요. 제 부모님은 여기 계시잖아요.”
“흑!”
순화의 눈물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준영아!”
* * *
손병승은 호텔 커피숍 한쪽 구석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었다. 누나인 혜정이 주선한 소개팅을 하러 나왔다. 여자는 몇 번 만나봤지만, 그것 뿐인 병승으로서는 당연히 부담스런 자리였다. 테이블에 놓인 물잔을 들어 물을 한 잔 마시면서 커피숍 입구 쪽을 보니,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날씬한 아가씨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저 여자 같은데…….’
병승은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 바르게 앉았다. 역시 여자는 병승의 테이블로 오더니 생긋 웃었다. 병승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소희에요.”
“손병승입니다.”
소희라 자기 소개를 한 아가씨는 자리에 앉더니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병승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병승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카페라떼 할께요.”
병승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고, 다가온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주며, 카페라테 두 잔을 주문했다.
그렇게 병승의 소개팅은 시작되었다.
“호호, 그림을 그리신다고요? 저도 항상 예술을 하고 싶었어요.”
병승의 눈이 커졌다.
“저는 렘브란트를 좋아합니다.”
“아, 그래요? 저는 바하를 좋아하는데요.”
“바하가 아니라 고흐 아닐까요?”
소희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병승을 쳐다보았다.
“바하나 고하나 거기서 거기죠, 안 그래요?”
이제 병승은 이 아가씨하고 얘기가 하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 지하철로 오셨어요?”
“아니요. 차 타고 왔습니다.”
소희의 눈이 반짝였다.
“무슨 차?”
“아, 버스 타고 왔습니다. 저는 지하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예…….”
소희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졌다.
병승은 말로만 듣던 머리가 텅 빈 여자가 바로 이 김소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병승도 막 나가기로 했다.
“실은 저는 마세라티를 탑니다만, 여기 주차하기도 힘들고 해서 그냥 두고 왔습니다.”
“어머, 그래요? 현대에서 새로 만든 차인가요?”
병승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탁 쳤다.
“유머 감각이 탁월하시군요.”
그래도 소희에게 실례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은 병승이었기에, 칭찬으로 넘어갔다.
소희는 병승의 이마가 빨개지는 것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마가 빨개지네요. 그렇게 치면 뇌세포가 죽지 않을까요?”
‘이 여자야, 너 때문에 내 뇌세포가 벌써 백만 개는 죽었다.’
“제가 오늘 또 다른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봐도 될까요?”
소희의 말에, 병승은 이제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계산서를 챙겼다.
“즐거웠어요. 병승 씨, 다음에 또 뵐까요?”
김소희는 병승에게 눈웃음을 쳤다.
“예. 언제라도 연락 주세요.”
병승은 전혀 본심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했다.
“어머, 연락은 남자가 먼저 해야지요, 안 그래요?”
소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럼, 연락처라도…….”
병승이 머뭇거리며 말하자, 소희는 핸드백을 열더니, 그 안쪽에서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냈다. 겉면에 금장으로 ‘명함집’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거 진짜 금이에요. 금 코팅. 처음 보죠?”
“네, 네.”
병승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만 싶었다.
소희는 케이스 뚜껑을 열고 하얀 명함 한 장을 꺼내 병승에게 내밀었다. 역시 테두리가 금장으로 코팅되어 있었다.
‘김소희, LEfFT, 기획실, 실장.’
병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거요? Liberal Energy for Future Trend의 약자에요. 레프트. 왠지 멋있어 보이지 않나요?”
‘이건 또, 뭔 뚱딴지람?’
병승은 명함을 포켓에 집어 넣었다.
‘다시는 연락 안 한다.’
그러나 병승은 소희에게 상냥하게 웃어보이며, “이제 가시죠.” 라고 말했다.
* * *
“여보,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미현은 현석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잠깐, 생각 좀 해 보고.’
“당신이 그동안 준영이에 대해서 생각이나 했어요?”
미현은 현석에게 타박을 했다.
“어허, 이 사람이…… 십 년 전부터 그 집에 계속 준영이 앞으로 돈을 보내고 있었어.”
이번에는 미현이 깜짝 놀랐다.
“뭐요? 나한테는 한 마디 말도 안 하고……. 어쩌면 그럴 수가…….”
“아빠, 그럼 아빠는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어요?”
현석은 윤영을 보았다.
“아니다. 그냥 돈은 보냈지만, 만나지는 않았다. 근황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도 군대 갔다와서부터는 나도 모른다. 택배 이야기도 처음 듣는 거야.”
“어머, 어머, 내가 지난번에 얘기했잖아요?”
미현은 현석에게 눈을 흘겼다.
“택배 그만 두었다니까, 이제 어디서 찾지?”
윤영은 생각에 잠겼다.
“왜, 준영이 만나고 싶냐?”
현석이 윤영에게 물었다.
“아니, 내 새 속옷이 사라졌잖아! 그게 얼마짜린데……. 그거 신상이란 말이야.”
현석은 기가 찼다.
“너는 그래 오빠가 궁금한게 아니라, 너 빤쓰하고 브라자가 더 궁금하냐?”
윤영은 배시시 웃었다.
“아빠, 저를 어떻게 보시고……. 저도 오빠가 궁금해요.”
“여보, 당신이 여기저기 좀 알아봐요.”
현석은 미현에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 그런데 진영이는 보냐?”
“요새, 진영 오빠도 통 안 봤으니까, 거기나 한 번 가볼래요.”
윤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2 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