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
“그럼 이제 가보셔도 되겠습니다.”
최종환은 앞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공손히 말을 했다.
남자는 일어나더니, 양복 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서 종환에게 내밀었다.
“이거, 약소합니다만, 잘 부탁합니다.”
종환은 봉투를 받아 안을 살펴보았다. 5 만 원짜리가 적어도 50 장은 되는 것 같았다.
“아니요.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건 그냥 가져가시고, 민원은 잘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아무 걱정 마세요.”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봉투를 안 받으려 했으나, 종환은 억지로 남자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럼 여기는 제가 내겠습니다.”
남자는 얼른 일어나 계산대로 갔고, 종환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2 만 원이라……. 한 번 밥 얻어 먹는 거는 괜찮겠지…….”
종환은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요새 혜정이하고는 잘 만나냐?”
이현석이 이진영에게 엄한 말투로 말을 하자, 진영의 심기가 뒤틀려졌다.
“아버지, 제 결혼은 제가 정합니다. 왜 자꾸 그러세요?”
“진영아, 여기 앉아 봐라.”
현석의 말에 진영은 소파에 앉았다.
“내 옛날 얘기 하나 해 줄까?”
진영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나 현석은 그러려니 하면서 입을 열었다.
“옛날에 네가 태어나던 날…….”
진영의 얼굴빛이 변했다. 그리고 그런 내색을 현석도 눈치를 챘다.
“그날, 우리는 진짜 가난했단다. 아빠하고 엄마 둘 다 학교를 자퇴했지. 병원비도 없어서 여기저기서 빌려서 냈고. 네 외할머니가 너를 많이 키워주셨지.”
“아버지, 왜 형 이야기는 안 합니까?”
현석은 가슴 속에서 울컥 하는 것이 올라왔으나, 그건 진영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네 형, 그래. 네 형이 있었지. 나는 네 형을 입양보내고, 그 돈으로 월세집을 얻었다. 일단 몸을 누일 공간이 생기니까, 그 다음부터는 일이 잘 풀리더라. 작은 식당이 맛있다고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고, 돈이 좀 생겼지.”
“그래서요? 그래서 형을 팔았나요?”
현석은 진영을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네 형이 입양간 집은 아버지가 구청 공무원이었다. 지금도 그 자리에 계시지. 너는 모르겠지만, 난 지난 십 년 정도 계속 그 집에 준영이 몫으로 생활비를 보내고 있다. 준영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준영이 소식도 듣고 있지. 너는 아비가 그냥 저 자리에 앉아만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절대 그렇지 않아. 앞으로 네가 저 자리를 받아야 할 텐데, 그냥 돈이나 계산할 줄 안다고 해서 회사가 돌아가는 건 아냐.”
진영의 눈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 아버지는 다 알고 있으면서, 형에 대해서 다 알고 있으면서……. 그래 지금까지 나를 속였어요?”
“아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하려고 했다. 엄마가 너한테 살짝살짝 말해주었잖니? 나도 그런 건 다 알고 있었다.”
진영은 이제야 부부가 뭔지, 부부 사이에는 비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손혜정이 머리에 떠올랐다. 과연 내가 그 차디찬 여자와 비밀을 공유할 수 있을까?
“아버지, 그럼 그 때라는 것이 언제입니까?”
현석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회장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미니 바로 갔다.
“술 한 잔 할까?”
진영도 소파에서 일어나 현석의 옆으로 걸어갔다.
“어디 우리 아들 취향이 얼마나 고급인지 볼까?”
진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 그냥 마시자. 요건 그냥 위스키야. 이름이…….”
현석은 병을 들어 라벨을 확인했다.
“영어라서 못 읽겠구나.”
그 순간 진영은 하하 웃어 버렸다. 아버지가 유머를 구사할 줄 알다니…….
현석은 잔을 들더니 한 잔을 그대로 마셔버렸다.
“크, 이놈의 술은 아무리 먹어도 적응이 안 돼…….”
현석은 인상을 쓰면서 잔을 내려놓았고, 진영은 그제야 자신의 술을 마셨다.
“진영아, 바로 오늘이 그때란다.”
현석은 진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직은 네 형이 아버지를 만나러 안 올 거다. 네가 잘 데리고 있어다오. 부탁한다.”
아버지의 예상 못한 말에, 그만 진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동안 가슴 속에 쌓이고 쌓였던 것들이 한순간에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제기랄, 이런 게 아빠인 거야…….
* * *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1 층 로비에 있는 경비가 손혜정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며, 마중을 나왔다.
“아저씨, 잘 지내셨죠?”
혜정도 경비 이상만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요.”
“항상 건강하세요.”
경비는 혜정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하며 연신 싱글거렸다.
“그럼 올라가세요.”
“예. 항상 감사합니다.”
혜정은 이상만에게 꾸벅 인사를 했고, 이상만도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똑똑!
혜정은 대답도 듣지 않고 회장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태화 투자 신탁 회사. 아버지 손진태의 ‘태’자와 어머니 강정화의 ‘화’를 합쳐 만든 회사. 그전에는 다른 이름이었으나, 손진태는 자신이 회장이 되면서 사명을 바꾸었다. 혜정의 어머니 강정화는 집안이 원체 부자였고, 혜정의 아버지, 손진태는 머리 하나로만 살아온 사람이다. 장인 강창식이 손진태를 맘에 들어, 무남독녀 외동딸의 사위로 삼았고, 손진태 회장은 장인의 부름에 몇 배로 보답을 했다. 간단히 말해서 손진태는 선물 투자의 귀재였다. ‘미’자로 시작하는 모 증권사에서 연봉 십 억을 받았었는데, 진태는 박 모 회장에게 연봉을 백 억으로, 열 배 인상해달라고 요구했고, 보기좋게 잘렸다. 이때 강창식이 접근하여 딸을 맡기게 되었고, 이제 태화 투신은 선물 투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위치를 차지했다. 진태의 시장의 흐름을 읽는 시각과 과감한 투자가 만나, 지금의 부를 일군 것이고, 큰 딸 손혜정은 그런 아빠의 투자 능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아빠, 저에요.”
“어, 누나가 웬일이지?”
진태의 옆에 서서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있던 혜정의 동생 손병승이 깜짝 놀란 표정이다. 불행히도 누나만큼 투자에 대한 배짱은 없지만, 진태는 하나 뿐인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빠, 나 결혼 언제 해요?”
혜정의 느닷없는 질문에 진태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있는 소파로 걸어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왜? 진영이가 속 썩이든?”
“아빠, 그깟 술 마시고 여자끼고 노는 건,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아하! 진영이 형이 또 그랬구나.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너는 입 좀 닥칠래?”
병승은 혜정의 말에 아무 말도 못했다. 누나 성질 건들다가 본전도 못 찾는 거야 기본이니까.
“혜정아, 결혼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때가 있다 이건가요?”
혜정이 진태의 말을 앞질렀다.
“혜정아, 남자란 말이야. 그러니까…….”
혜정은 진태의 ‘그러니까’ 하면서 설명하려 드는 게 아주 싫었다. 하지만 아빠의 고질적인 버릇이니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남자는 말이야, 어른이 되어야 결혼을 할 수 있단다.”
혜정의 눈에 화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진태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선물은 증권하고 다르다는 것쯤은 너도 잘 알지? 선물은 제로 섬(zero sum) 게임이지. 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잃는 자도 있다.”
“아빠, 그게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지요?”
“혜정아, 결혼도 제로 섬 게임이란다. 한쪽이 얻는 게 있으면 다른 쪽은 잃는 게 있는 법. 너 역시 결혼을 하게 되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생기게 된다. 아직은 네가 더 손해야.”
“아빠, 이해가 안되는데요?”
“진영이는 아직 덜 여물었다. 너는 충분히 여물었고. 진영이가 돈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그때 시켜주마.”
혜정은 헛웃음이 나왔다.
“아빠, 그럼 언제까지 그 꼴을 보라는 거에요?”
“하하하.”
진태는 웃어버렸다.
“어린 아이들은 장난감을 사주면 어떻게 하든?”
“…….”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버린단다. 남자는 어린애하고 비슷해. 진영이가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 싫증이 나면, 그때 깨달음이 온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마음껏 돈을 벌 수가 있어.”
혜정은 아빠인 진태의 능력을 철석같이 믿지만, 가끔씩 그 궤변이 몸서리치도록 싫어지기도 했다. 딱 바로 지금 그 순간이었다.
“혜정아, 남자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탱크, 비행기, 자동차 이런 거 아주 좋아하지? 그렇지?”
병승도 어느새 혜정의 옆에 앉아서 진태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병승은 자기가 아버지보다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항상 아버지의 모든 말을 기억해두려고 했다.
“예를 들자면, 남자들은 커서도 자동차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지. 그건 바로 어른이 덜 되었다는 거야. 남자가 자동차에 대해서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아이에서 어른이 된단다. 아직 진영이는 애기야. 너 애기하고 결혼할래? 그거 키우려면 너 마음 고생이 엄청날 텐데…….”
혜정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진태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면, 뭐라 더 주장할 수가 없게 된다.
“병승아, 너는 요새 뭐하냐? 그때 그 아가씨는 어떻더냐?”
진태의 말에 병승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 김소희요? 그냥 더 만나보려고요.”
“잘 생각했다. 사람은 말이야, 몇 번 만나봐야 하는 법이지.”
진태가 점잔을 빼며 말했다.
* * *
“잘 먹었다. 형! 감사! 역시 저녁은 이렇게 먹어야지.”
진영은 준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근데 형, 하나만 물어보자.”
준영의 얼굴이 뭐지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하면 싸움을 잘 할 수 있어?”
준영은 그만 웃어버리고 싶어졌다. 절대 싸울 일이 없는 녀석들이 꼭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법이다. 준영은 진영이 그놈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려니 했다.
“정말 알고 싶어?”
“궁금하기도 해. 격투기 이런 거 배울까? 어때?”
준영은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진영의 팔을 내렸다.
“잘 들어. 싸움은 말이야. 특히 길거리 싸움은 말이야.”
그리고 준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고, 진영은 진지하게 말을 듣고 있었다.
“딱 열 번 만 싸워봐. 이길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막 싸우면 돼.”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열 번 싸우면, 아마 열 번 다 얻어맞겠지. 다치기도 하고. 그런데 그러면 저절로 싸움에 대하여 알게 돼. 싸움 기술이 아니라, 싸운다는 것이 뭔지.”
진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
“됐어. 나는 그만 둘래. 어, 기타리스트네. 가보자.”
진영이 가리키는 곳에서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젊은 남자가 기타를 하나 들고, 연주를 하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음악이었다. 벌써 진영은 그 앞에 가서 연주를 듣고 있었다. 준영도 따라가서 그 옆에 섰다.
음악 연주가 끝났다.
진영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오만 원짜리 스무 장을 꺼냈다. 그걸 기타리스트의 앞 인도에 놓인 검은 색 페인트 통에 집어 넣었다. 기타리스트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부탁합니다.”
기타리스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진영에게 질문을 했다.
“파솔라파도 라 솔도솔……. 이렇게 나가는 거 말씀이시지요?’
진영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기타리스트는 연주를 시작했다.
‘파솔라파도 라 솔도솔 파미라 파미 파미레미 파솔도…….’
음악이 기타에서 흘러 나왔다. 아름다운 선율이 기타리스트의 손끝에서 흘러 나왔다.
진영과 준영은 그렇게 가만히 거리에 서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행복을 느꼈다.
“진영아, 그런데 백만 원은 너무 큰 돈 아니냐? 그런 데 쓰기엔…….”
“형, 난 그렇게 쓰레기는 아니야. 예술가를 존중할 줄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