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장.
진영은 아침부터 서둘렀다.
“진영아, 어디 가냐?”
준영은 진영에게 슬쩍 말을 붙여 보았다. 그러나 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영아.”
그제야 진영은 준영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형, 일 주일에 두 번씩 아버지한테 경영 수업 받으러 가야 해. 오늘이 그 날이야. 월요일 하고 목요일.”
준영은 진영이 새삼스레 다르게 보였다. 어쩔 때는 철없는 재벌 2 세로 보였다가도, 어쩔 때는 뭔가를 가슴 속에 간직한 그런 사람으로도 보였다. 그런데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진영은 자기와 다르다는 점. 진영은 아리랑 회사를 이어받을 사람이라는 점.
“그럼 나는 뭐할까?”
진영은 이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저녁에 만나. 일곱 시 정도. 오늘은 소개시켜 줄 사람도 있어.”
준영은 허허 웃었다.
“여자는 너 혼자 만나라. 나는 별로…….”
진영은 빙그레 웃었다.
“아니. 이번엔 남자.”
준영은 진영의 속을 통 알 수가 없었다.
“형, 차나 한 대 사줄까?”
진영이 준영에게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차? 야, 나는 그런 거 필요없다.”
“왜? 차가 있으면 계집애들을 얼마든지 태울 수 있는데.”
“진영아, 너 택배 차에 여자 태워봤냐?”
진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형! 택배 트럭으로 여자를 꼬셔본 거야?”
“짜식! 당연히 택배 차에 여자가 안 타지.”
“뭐라고? 나 좀 그만 웃겨.”
진영은 준영의 엉뚱함에 그만 웃고 말았다.
“진영아, 잘 들어. 진짜 여자는 말이야, 남자를 볼 줄 아는 여자는 말이야, 벤츠에 안 타고 택배 차에 탈 수도 있어.”
진영은 준영의 말을 듣자, 뭔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준영의 말은 서툴렀지만, 그리고 비유조차 어울리지 않았지만, 준영이 자기보다는 인생에 대해서 더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형, 그런데 선경이라는 동생은 안 보여줄 거야?”
“왜 그러냐?”
진영은 준영의 손목에 매달려 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 고물 시계를 지금까지 차고 있는 형을 보니, 선경이라는 여자가 궁금해졌어.”
“너는 여자 있잖아? 손혜정.”
진영은 코웃음을 쳤다.
“그 차디찬 냉동 인간. 내가 딴 여자들하고 뭔 짓을 하는지 다 알면서……. 자기는 얼마나 고고하다고…….”
준영은 진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한 번 밖에는 안 봤지만, 준영이 보기에 혜정은 상당히 좋은 여자처럼 보였다.
“그럼 왜 만나냐? 정리하면 되지.”
진영은 한숨을 쉬었다.
“형, 있잖아. 내가 어떻게 형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진영의 말에 준영은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이상했다.
“엄마가 말해준 거야. 내가 중학교 때인가 아마 그랬을 거야. 그런데 이거 알아? 아빠는 그전에도 그리고 그후에도 절대 형 얘기는 안 해.”
“그런데?”
“손혜정의 아빠, 태화 그룹 회장 손진태하고 우리 아빠 이현석하고 죽마고우란 말이야.”
‘아하’
준영은 이제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나하고 혜정이는 처음부터 정혼이 되어 있었다 이거야.”
진영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면서, 눈시울까지 빨개졌다.
“난 어쨌든 아빠가 형을 버린 것도 싫고, 게다가 내 결혼까지 간섭하는 게 싫어.”
준영은 비록 자신이 진영이보다 세상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서 더 잘 알지만, 성격만은 진영이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영은 가만히 진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진영이 참고 있는 게 느껴진다.
‘대체 손혜정은 어떤 여자일까?’
준영의 머리 속에 혜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진영은 집을 나갔고, 준영은 혼자 남았다.
‘선경이에게 전화나 해 볼까?’
* * *
“와, 오빠, 진짜 집 좋다.”
선경의 눈이 휘둥그래지졌다.
“야, 너 눈 찢어지겠다.”
준영은 선경을 놀려댔다.
“와, 오빠, 대체 몇 평이야? 이거 좀 봐. 거실 넓은 거 봐. 방이 몇 개야?”
준영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담배를 집어들었다.
“선경아, 참고로 말하는데, 화장실이 세 개다.”
선경은 준영의 옆에 앉으며,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럼, 우리 집 같으면, 한 명씩 개인 화장실이 있는 거네.”
준영은 담배를 피면서 선경에게 미소를 지었다.
“오빠, 그럼 오빠 친부모들은 엄청 부자구나.”
“선경아, 그건 나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
“나 목이 마른데…….”
준영은 얼른 일어나 담배를 재털이에 끄더니, 주방으로 갔다. 거기서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이 모습을 본 선경이 결국 준영에게 다가왔다.
“오빠, 뭐해?”
준영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게, 컵이 어디 있지?”
선경이 보니, 주방에는 싱크대와 전기 인덕션만 보일 뿐 그외 식기류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단지 싱크대 앞 거울에 작은 리모컨이 하나 붙어 있었다. 선경은 그 리모컨을 빼들었다. 버튼이 두 개 있었다.
‘열림’ 그리고 ‘닫힘’
선경은 열림 버튼을 눌렀고, 그러자 싱크대 우측 벽, 화려한 꽃무늬가 아로새겨진 아이보리색 벽면의 가운데 부분, 정중앙의 기둥은 그대로인 체, 왼쪽과 오른쪽 부분이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각각 회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반 바퀴를 돌자, 거기에서 각종 식기류 및 기타 등등 주방용 소품들이 층층이 가지런히 정리된 선반이 나왔다.
선경은 리모컨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준영에게 매달렸고, 그런 선경을 준영이 안았다.
잠시 후, 준영은 얼른 선경을 밀어냈고, 얼굴이 홍당무가 된 선경은 조용히 리모컨을 집어들어 거울에 다시 붙였다.
“이게 대체 뭐야?”
준영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고, 선경은 모르는 척 선반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크리스탈 잔 두 개를 끄집어 냈다.
“야, 선경아, 그거 함부로 만지면 안 돼.”
“피이, 그런 게 어딨어?’
선경은 냉장고 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 오렌지 주스를 찾아냈다.
“오빠야, 우리 이거 마시자.”
준영과 선경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 가게에서 처음으로 병에 든 오렌지 주스를 하나 사서, 둘이 나눠 마시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래, 그때 참 좋았어.’
“선경아, 그거 마시고 나가자.”
“그래.”
* * *
“아버지, 시작하시죠.”
진영은 현석에게 어서 경영 수업을 시작하라고 재촉했다.
현석은 그런 진영을 보면서 빙그레 웃기만 했다.
“진영아, 너는 경영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현석의 갑작스런 질문에 진영의 말문이 막혔다.
“경영은 말이야, 아주 간단히 말하면, 돈을 버는 것이란다.”
진영은 현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돈만 벌 생각을 하면, 회사가 다 망하더라 이거야.”
“왜요? 돈을 잘 벌면 회사가 망할 수가 없잖아요?’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란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회사를 개편할 생각이야.”
“어떻게요?”
“아리랑은 프랜차이즈 회사가 아니더냐? 그렇지만, 나는 가맹점을 폐지하고, 모든 가맹점 직원들을 아리랑 직원으로 흡수하여, 하나의 회사로 만들고 싶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석은 진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중에 네가 이 회사를 운영할 때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야. 그리고 그 준비는 내가 해 줄 것이고.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자, 밥 먹으러 갈까?”
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진영도 따라 일어났다. 진영은 아버지 이현석의 말이 하나도 이해가 안 되었지만, 뭔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 * *
“누나, 진영이 형 한 번 봅시다.”
“왜?”
“내가 할 말도 있고, 솔직히 말하면, 속내를 좀 들여다 보고 싶어서…….”
“네가 들여다 보면 알까?”
혜정의 심드렁한 말에도 병승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누나야 여자니까, 남자들의 세계를 잘 모를 수도 있어.”
“뭐라고?”
혜정의 두 눈썹이 모아졌다.
“아니, 미안.”
“그 잘난 남자들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