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장.
“형, 어서 와.”
진영은 한식집 안쪽에 마련된 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준영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얼굴이 아침과는 다르게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진영의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영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고, 일어난 남자는 준영에게 인사를 했다.
준영도 엉겁결에 같이 인사를 했고, 진영의 말이 날아왔다.
“형, 앉아. 영구 형도 앉아.”
둘이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자, 진영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이쪽은 우리 회사 고문 변호사. 송영구 씨. 나이가 나보다 세 살 많아서, 내가 형이라 불러.”
“상무님도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송영구라 소개된 남자가 굵직한 목소리로 진영의 말에 답을 했다.
“여기는 내 친형. 세상에 하나 뿐인 내 형. 이준영.”
최준영은 송영구에게 고개를 숙여 다시 인사를 했다.
송영구는 준영에게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이제 다들 모였으니까, 술 한 잔 할까?”
진영의 제안에 다들 얼굴이 풀렸다.
“상무님, 여기 한우가 아주 좋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송영구가 분위기를 띄웠다.
“영구 형, 그럼 주문을 부탁합니다.”
진영이 영구에게 말을 하자, 영구가 눈을 크게 떴다.
“상무님, 변호사 자문료가 얼마나 비싼지 아십니까?”
“뭐요?”
진영이 놀라자, 준영도 덩달아 깜짝 놀랐다.
“하하, 농담입니다. 미국식 농담.”
준영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형, 그럼 오늘은 마음 놓고 한 잔 해. 요새 아버지하고 잘 지내거든.”
준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런 준영의 얼굴을 본 진영은 속으로 아차 했다.
“미안.”
“아니다. 괜찮아. 이따 저녁에 집에 가 봐야겠다.”
준영은 아버지 종환이 떠올랐다. 어머니 송순화도 생각났다. 아마 두 분은 김치찌개나 된장국을 먹고 있을 것이다.
‘난 여기서 한우를 먹는데…….’
진영이 옆에서 준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진영은 소주병을 들어 준영의 앞에 놓인 잔에 넘치도록 소주를 부었다. 준영은 그 잔을 보다가 다시 진영을 보았다. 어째 달라진 분위기가 어색해 보였으나, 준영은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자, 그래 마시자. 변호사님도 마시지요.”
준영이 잔을 들었고, 세 남자들은 한 번에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식당 내실의 문이 드르륵 열리며, 깨끗하게 차려입은 아줌마가 삼단으로 쌓여진 대나무 트레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안심하고 등심, 그리고 갈비살이에요.”
“거기 놓고 가세요. 우리가 구울 테니까.”
아줌마는 얼른 테이블 옆에 음식을 내려놓고 방을 빠져나갔다.
* * *
현석과 미현 그리고 가정부 허 실장과 김 실장, 네 명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실장님들은 집안 일 하기가 어때요?”
김 실장과 허 실장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더 나이가 많은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일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에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회장님, 그 택배 기사 말이에요…….”
“흠, 흠.”
미현은 가정부들이 준영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주의를 주었다.
김 실장은 미현의 마음을 눈치채고 즉시 말을 멈추었다.
“왜 그래? 김 실장.”
“회장님, 아닙니다. 그냥 잊어버리세요.”
현석은 이제 그만 먹으려는 듯 젓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두 가정부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 택배 기사가 아들입니다. 예전에 잃어버렸던 아들이에요.”
두 가정부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찾았으나, 아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인지, 힘들어 합니다. 이해하세요.”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김 실장과 허 실장이었다.
현석은 미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요새 진영이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니 안심해도 돼.”
“그럼 다행이지요.”
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옮겨갔다. 그런 미현을 현석도 따라갔다.
“여보, 현석 씨, 나, 준영이가 보고 싶어요.”
미현은 현석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걱정 마. 진영이가 데리고 있잖아. 어쩌면 둘 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야.”
현석은 한숨을 쉬었다.
“김 실장, 나, 술 한 잔 줘.”
“예, 회장님.”
* * *
띠리링! 띠리링!
진영은 전화기가 울리자, 화면에 뜬 이름을 보더니 ‘거절’을 눌러버렸다.
“야, 왜 그래?”
준영은 진영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이번에는 송영구의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송영구입니다.”
송 변호사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았으나, 일부러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폰에서 뭐라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 거깁니다. 알겠습니다.”
진영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영구를 쳐다보았다.
“형 번호도 알아?”
“상무님, 저는 고문 변호사입니다. 제 번호는 그룹 사람들이 모두 알지요.”
“쳇, 그 여자는 아니잖아?”
“진영아, 왜 그러냐?”
“손혜정이야.”
준영은 이해가 되었다. 진영이 전화를 거절하자, 손혜정은 송영구에게 전화를 걸어 여기 식당을 물어 본 것이리라.
‘이제 조금 있으면 또 한바탕 휘몰아치겠군.’
내실의 문이 다시 열리며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들어왔다.
“어이, 진영이 형, 오랜만!”
쾌활하게 인사하며 들어오는 젊은 남자는 얼굴이며 패션이며, 한마디로 강남 스타일이었다.
“여, 그래. 들어와.”
진영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송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송영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비켜 주었고, 젊은이는 송영구의 자리 안쪽으로 앉았다.
남자 뒤에서 손혜정이 따라 들어왔다. 샤넬 라인으로 입은 플레어 스커트를 살짝 오므리더니 진영과 준영의 사이에 앉았다. 준영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쯤 일어나 버렸다.
‘저 변호사를 실장이라 부르네? 손혜정은 알겠는데 저 남자는 누구지?’
진영이 준영에게 소개를 했다.
“여기는 알고, 저기는 혜정 씨 동생 손병승. 태화 투신 후계자.”
“하하, 형도 참……. 아리랑 그룹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
병승이 진영에게 웃어 보였다.
“아, 여기는 내 형. 이준영이야. 인사해.”
준영과 병승은 서로 인사를 했다.
“왜 왔어?”
“진영 씨, 내가 어디 못 올 데라도 왔어?”
만나자마자 티격태격이다. 준영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런 준영을 혜정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쏘아보았다. 준영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휴, 진짜 차갑기는…….’
혜정이 술잔을 들더니 영구에게 내밀었다.
“한 잔 주세요. 실장님.”
영구는 혜정의 말을 듣자마자 얼른 무릎을 꿇더니, 소주병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공손히 혜정에게 술을 따랐다.
“요새 법무실은 별 문제 없죠?”
“덕분에 잘 돌아갑니다.”
준영이 보기에, 송영구 아리랑 법무실장이 혜정을 바라보는 눈길이 흡사 공주님을 보는 것 같았다.
다들 술이 들어가자 말이 많아지면서 떠들어댔다. 단 한 사람, 손혜정만 빼고.
“형, 이제 여자들은 그만 하지?”
“뭐? 병승아, 네가 뭘 안다고 그래?”
“형, 누나도 여자야. 안 그래? 형이 맨날 여자끼고 히히덕거리면 누가 좋아해? 나라도 안 좋아해.”
“뭐라고? 야! 너나 잘 해.”
“진영 씨, 병승이는 여자 문제 없어요.”
혜정의 차가운 말이 나오자, 진영은 탁 하고 술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준영은 얼른 자기 잔을 비운 다음, 진영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진영아, 한 잔 받아.”
진영은 준영이 내민 잔을 받더니 혜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혜정은 두 손으로 소주병을 잡아 진영에게 술을 따랐다.
“진영 씨, 우리 정혼한 사이잖아. 이제…….”
갑자기 혜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영을 달랬다. 진영의 얼굴에 당황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갑자기 왜…….”
“진영 씨, 내가 평범한 여자였으면 더 좋았겠지?”
“흠, 흠.”
영구가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아까부터 혜정의 얼굴을 슬쩍슬쩍 쳐다보던 그였다.
준영은 그런 송영구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빠, 저 왔어요.”
준영은 거실 중문을 밀고 들어갔고, 종환과 순화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어서 오너라.”
순화는 준영에게 달려가 얼싸안았다.
“너, 그런데 열쇠는 어떻게…….”
“선경이가 카드키 하나 줬어요. 자주 오라고.”
종환은 허허허 웃었다.
“역시 선경이가……. 마음 씀씀이는 알아줘야 해.”
“그런데, 선경이는 아직 안 왔어요?’
“아직, 기집애가 요새 뭐하는지 맨날 늦더라.”
순화가 투덜댔다.
그 순간 다시 문이 열렸고, 선경이 집으로 들어왔다.
“어? 오빠 왔네?”
선경은 거실로 오더니 인상을 구겼다.
“어휴, 술 냄새, 담배 냄새!”
준영은 선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화장실로 갔고, 거기서 입을 헹구고 나왔다.
“준영아, 밥은 먹었냐?”
“예. 먹었습니다.”
종환은 텔레비젼을 끄더니 순화를 불렀다.
“오랜만에 우리끼리 한 잔 할까?”
순화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아빠, 정말 최고다.”
선경은 진심으로 좋아했고, 준영도 그런 선경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선경의 모습 뒤로 손혜정의 자태가 자신도 모르게 오버랩되었다. 준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오빠, 왜 그래? 머리 아파?”
선경이 준영을 잡았고, 준영은 눈을 몇 번 떴다 감았다 했다.
“아니야. 나 원래 두통 같은 거 없잖아.”
“다들 이리 오세요.”
순화가 주방에서 모두를 불렀다.
정말 오랜만에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오붓하게 맥주 한 잔에 구운 오징어를 뜯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
준영의 마음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