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Gold)과 피(Blood)-17

by 윤금현

17 장.



준영은 아침 식사를 양부모 그리고 선경과 하고 나서, 진영의 빌라로 왔다. 그러나 진영은 없고, 대신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저녁에 식사 약속이 있으니 다른 일정 잡지 마.]

‘무슨 일이지?’

준영은 오늘은 그냥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도서실로 사용하는 방으로 갔다. 한쪽 벽면 전체가 책장이었고, 준영으로서는 처음 보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준영은 책들을 주욱 훑어보다가, 앨범들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거나 한 권을 꺼내 펼치자, 진영의 어린 시절이 나왔다.


* * *


“자, 다들 주목해 주세요.”

교감인 황태선 선생이 전체 선생들 앞에 섰다.

“오늘부터 새로 출근하는 최선경 선생님입니다. 과목은 과학입니다.”

교무실 곳곳에 앉아 있던 남녀 선생들이 다들 박수를 쳤다.

선경은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최선경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선경은 인사를 하였고, 황태선 교감은 손짓으로 한쪽 책상을 가리켰다.

“저기가 선생님 자리입니다. 그리고 오늘 조회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선경은 자기 앞으로 배정된 책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지난 번 중학교는 여름으로 계약이 끝났고, 이제 새로운 중학교와 다시 계약을 했다. 지난 번 학교에서 추근대던 남선생을 안 봐서 기분이 좋았다.

‘설마 여기에서도 그러지는 않겠지?’

선경은 고개를 내밀고 교무실을 스윽 보았다. 거의 다 여선생들이고, 남선생들은 나이가 지긋이 드신 분들이었다. 선경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 * *


띠 하는 인터폰 소리가 울리자, 현석은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회장님, 가족분들이 오셨습니다.”

전화기에서는 상냥한 여비서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해. 내가 곧 내려갈 거야.”

“예. 알겠습니다.”

현석은 책상 위에 널려 있던 서류뭉치들을 한 손으로 끌어당긴 다음,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속으로 그대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두 손을 탁탁 털었다.

책상 너머에 서 있던 영구가 빙그레 웃었다.

“회장님, 그럼 점심 식사 후에 뵙겠습니다.”

법무실장 송영구는 현석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아빠, 점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윤영이 현석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렸다.

“중식 먹으러 갈까?”

미현은 아직도 짜장면을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알고 있다.

메롱!

윤영은 미현에게 혀를 쏙 내보이며 다시 현석을 보았다.

“아빠, 오늘은 우리 유럽식으로 먹으러 가요, 예?”

미현은 윤영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얘는 맨날 그런 느끼한 것을 좋아한데냐?”

“허허, 그러자. 근데 엄마 생각도 해야 하니까, 우리 요 앞에 부페 갈까?”

윤영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으나, 미현의 얼굴을 보더니 마지못해 끄덕거렸다.

“여보, 그런데 준영이는 아직 회사로 안 불렀어요?”

현석은 미현의 말에서, 미현이 준영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직. 그리고 준영이한테는 아직 회사 일이 무리야.”

“아빠,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고…….”

“그러자.”

현석은 앞장서서 길을 걸었고, 그 뒤를 팔짱을 꼭 낀 미현과 윤영이 따랐다.


* * *


혜정은 의자를 당기며, 테이블에 앉아 있던 병승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웬일이니? 점심을 다 산다고 하고…….”

병승은 그런 혜정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누나, 왜 이래? 나도 쿨 가이란 말이야.”

혜정은 피식 웃어보렸다.

“야, 쿨 가이 다 죽었다. 요런 조그만 것이, 어디서…….”

“안녕하세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여자 소리에 혜정은 얼른 돌아보곤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김소희, 네가 여긴…….”

혜정은 다시 병승을 보았다.

“어쭈, 어쭈, 아주 웃기는 상황이네. 야, 손병승!”

병승은 쭈빗쭈빗 일어서며, 머리를 긁었다.

“누나, 미안해. 소희 씨가 누나 보고 싶다고 해서.”

혜정은 자리에 앉았고, 소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소희와 병승도 자리에 앉았다.

“남자를 잡으려면, 가족들을 먼저 공략해라. 이런 말도 있잖아요? 언니?”

“호, 그러셔?”

혜정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속마음은 소희가 싫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적극적인 면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근데, 소희야, 너는 왜 이런 철딱서니 없는 애하고 만나냐? 혹시 부잣집 아들이라서?”

김소희는 방그레 웃었다.

“네, 언니, 부잣집 아들이라서요.”

선선히 인정을 하는 소희였고, 병승의 얼굴이 오히려 빨개지고 말았다.

“됐네. 그럼 주문을 하고, 입 속에 밥이나 처 넣기로 하자.”

이제 혜정은 막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병승은 일어서더니 계산대 쪽을 보았고, 그런 병승에게 웨이터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 * *


최준영과 이진영 그리고 송영구는 진영의 빌라 앞에서 내렸다. 진영의 벤츠를 대신 몰고 온 대리기사에게는 송 변호사가 기사 비용을 냈다.

“여기, 수고하셨으니까, 팁으로 만 원 더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삼십 대 중반의 대리기사는 인사를 꾸벅하더니, 골목길을 부리나케 내려갔다. 그 모습을 준영은 한참 바라보았다.

“형님은 뭘 그리 보세요?”

영구는 진영의 형이기 때문에, 진영의 관점에서 준영을 형님이라 불러 주었다. 그런 영구의 말에 준영은 피고 있던 담배를 길바닥에 버리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오. 하하, 실은 어쩌면 저 모습이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준영의 말에 영구는 준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서, 준영은 진영에게로 다가갔다.

“진영아, 들어가야지.”

“실장님, 아니 우리 영구 형, 들어가서 한 잔만 더 하고 가요.”

“그럴까요?”

영구는 흔쾌히 진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커다란 유리컵 세 잔을 나란히 놓은 진영은 익숙한 솜씨로 소맥을 만들어 내었다.

“형, 이거 한 잔씩, 일단은…….”

세 명의 남자들은 주방에 있는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형들, 나는 말이야, 착한 여자가 좋아.”

영구가 진영에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상무님, 그게 어디 맘대로 됩니까? 그리고 제가 보기론 세상에 착한 여자는 정말 드물더군요.”

진영은 영구에게 엄지를 들어보였다.

“역시, 달라도 달라. 그렇지요? 그래도 나는 무조건 착한 여자에 한 표.”

준영은 아무 말없이 소맥잔을 들어서 한 번에 마셨다. 준영의 생각으로는 다들 배부른 소리들을 하고 있었다. 진영으로 말하자면, 그런 미모를 가진 부자집 딸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라면, 그런 여자…….’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진영이 준영을 부르자, 깜짝 놀란 준영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형, 또 선경인가 그 여자 생각하는구나? 그렇지?”

준영은 잠자코 있었다.

“선경? 누구지요?”

영구가 옆에서 끼여들었다. 이제 송 변호사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게…….”

준영은 뭐라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준영과 진영의 관계에 대해서 송영구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형님은…….”

진영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그의 눈빛이 영구를 쏘아보고 있었다.

“상무님, 회장님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진영은 아버지 이현석이 나오자 수그러들었다.

“최준영 씨, 아까는 이준영이라고 소개를 받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준영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저는 아리랑 그룹 법무실의 실장입니다. 고문 변호사라는 직책이……. 그게 집안의 집사 같은 역할도 하기 때문에, 남들은 모르는 집안 일을 소상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요?”

준영이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회장님으로부터 준영 씨에게 잘 해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말도 하셨습니다. 아까 나온 선경, 최선경이라는 아가씨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준영 씨, 회장님은 결코 준영 씨를 잊어버린게 아닙니다. 그것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영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끝낸 다음, 입을 닫았다.

준영이 옆을 보니, 진영은 슬슬 졸기 시작했다.

“상무님은 손혜정 씨와 정혼한 사이기는 하지만, 본인은 항상 그럽니다. 착한 여자가 좋다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부자집 아들을 만나려 하는 여자들이 착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손혜정 씨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이상한 여자 만났다가, 상무님 인생이 꼬이는 수가 있습니다.”

준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점점 송영구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나가면 여자는 한 트럭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준영은 이 송영구 변호사라는 사람이 점점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워지기도 했다. 주먹으로 싸운다면, 몇 분 내에 길바닥에 주저앉힐 자신은 있었지만, 이 사람의 머리 속에 든 것을 생각하니 절로 오싹해졌다.

“실장님은 여자 있습니까?”

“하하, 변호사한테도 여자들이 은근히 꼬이는 법이지요. 하지만 저는 여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영구는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어갔다.

“준영 씨, 회장님은 십 년 전부터, 그러니까 돈을 좀 모은 다음부터는, 준영 씨 집에 생활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모든 걸 처리하니까, 잘 알지요.”

준영은 정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준영 씨, 준영 씨는 입양을 가서 어린 시절은 그런대로 살지 않았습니까? 회장님과 상무님은, 특히 상무님은 어린 시절을 정말 힘들게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회장님이 저한테 직접 해주신 얘기입니다.”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혹시 아버지가 시키던가요?”

영구는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다시 한 모금 마시더니 순순히 털어놓았다.

“예. 회장님은 지금 준영 씨가 여기에 사는 것도 다 아십니다. 아마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한테 잘하라고 하셨지요.”

준영은 전혀 기억에 없는 친아버지가 어떤 사람일까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태어나자마자 입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준영은, 자신의 친부모에 대해서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낳아준 사람보다 키워준 사람이 진짜 부모라고 생각하는 준영에게, 이현석이 십 년 전부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못내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준영 씨, 회사는 상무님이 물려받을 테지만, 아마 형님에게도 회장님은 뭔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직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지만…….”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영구는 맥주병과 소주병을 한 손에 하나씩 들더니, 소맥을 두 잔 만들어 내었다. 그 중 하나를 준영에게 내밀었다.

“자, 한 잔 하세요.”

둘은 건배를 한 후, 소맥을 단숨에 마셨다.

“회장님은 아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앉아 있던 진영은 이제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제가 재우겠습니다.”

영구는 진영을 부축하여,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준영이 보니, 영구는 침대에 진영을 눕히더니, 베개를 받쳐준 다음, 이불을 살짝 덮어주었다.

‘나는 친형제이지만……. 저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