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장.
“형, 오늘은 휴일인데, 우리 오랜만에 교외나 나가 볼까?”
진영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준영에게 말을 붙였다. 기분이 좋아보인다.
“그러자.”
준영도 덩달아 신이 났다. 진영이 손혜정과의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형, 그런데 말이야…….”
진영이 왠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준영은 그런 진영을 보자 의아스러웠다. 놀러 가자는 사람이 갑자가 또 무슨 꿍꿍이지?
“남자 둘이 놀러 가면 무슨 재미야? 안 그래?”
준영은 속으로 아하 하면서 진영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준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진영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그거 좋지. 손혜정 씨를 부를까?”
순간 진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준영은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얼른 진영을 따라 들어간 준영은 드레스 룸 문에 기댄 채 진영을 보았다.
진영은 시원하게 보이는 파란색 줄무늬 셔츠와 회색 바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형, 이걸로 입을까?”
준영은 이제 팔짱을 꼈다.
“진영아,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
그러나 진영은 여전히 말이 없다.
“진영아,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난 다 이해하니까.”
진영은 셔츠와 바지를 다 입은 다음에야 준영에게로 돌아섰다.
“거, 형 동생 있잖아? 형이 좋아하는 여동생.”
“뭐? 선경이 말이냐?”
“그래. 이제 한 번 봐도 되잖아, 안 그래?”
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없이 전화기를 꺼내들고, 통화 목록을 뒤졌다.
[최선경]
잠시 후, 전화기에서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아침부터 뭔 일?”
선경의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준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 * *
“엄마! 나 놀러가!”
선경은 기분이 들떠서 순화에게 자랑을 했고, 순화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이 옷 저 옷을 고르는 딸을 보고만 있었다.
“선경아, 누구랑 가냐?”
“오빠.”
“뭐? 준영이?”
종환은 거실에서 모녀의 대화를 듣더니, 선경의 방으로 왔다.
“준영이가 부르데?”
“예, 아빠. 오늘 좀 늦게 올께요. 그래도 되죠?”
“그거야 상관없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는 말아라.”
종환이 선경에게 눈을 끔벅했다.
“아이, 엄마, 옷 좀 골라봐.”
“가시내가, 무슨 옷 타령이냐? 그냥 빤쓰나 안 보이면 되지…….”
순화는 선경을 구박했다.
* * *
진영은 스마트폰을 들더니 전화를 걸었다.
“어디 거냐?”
준영이 말했으나, 진영은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엄마, 저에요.”
“진영이구나.”
스피커폰이 켜져 있어서, 미현의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고, 준영의 몸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생전 처음 듣는, 아니 태어나서 처음은 아니었겠지만, 친엄마의 목소리를 이렇게 알아듣는 것은 준영에게 처음이었다. 준영은 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에게 엄마 목소리를 들려주려 하는구나.’
“엄마, 오늘 놀러갔다 올게요.”
“웬일이니? 네가 그런 걸 다 얘기하고.”
“엄마, 형이랑 같이 가요.”
“…….”
전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왔다.
준영은 미현이, 친엄마가 무척이나 놀랐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미현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진영의 앨범에서 보았던 젊은 날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이제는 얼마나 변했을까?’
“엄마, 왜 말을 안 해?”
“흑흑.”
전화기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진영은 당황했다. 진영은 준영의 얼굴을 보았고, 준영 역시 뻣뻣이 굳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무 급했나?’
“엄마, 끊어요.”
“집에 언제 올 거니?”
다급한 미현의 소리가 나왔고, 준영은 그 말이 자기에게 한 말임을 알았다.
“다음 주에 갈께요.”
진영은 얼른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형, 미안. 너무 놀랬지?”
준영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하얀색 벤츠가 코너를 돌더니, 아파트 단지 정문에 멈췄다. 정문 바리케이트가 내려져 있었고, 그 바로 옆 경비실 앞에 커다란 분홍빛 모자를 쓴 화사한 옷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선경아!”
준영은 차에서 내리면서 선경을 불렀다.
분홍빛 모자를 벗은 여자는 준영을 보더니, 팔짝팔짝 뛰면서 벤츠로 달려왔다.
“오빠, 차도 생겼어? 와, 좋네.”
운전석 문이 열리며 진영이 나오자, 이선경은 목을 움츠리며 킥킥거렸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이거 오빠 차 아니지?”
진영은 선경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이진영입니다.”
선경은 진영을 보더니 너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빠…….”
준영은 쑥스러운 듯 머리만 긁어댔다.
선경은 진영의 얼굴이 준영과 너무나 똑같아, 그만 자기도 모르게 오빠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진영입니다. 최선경 씨죠?”
파란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어, 놀러 가기에는 눈이 부시도록 너무나 맑았다.
“그래 가지고 그랬답니다.”
“호호호.”
선경이 까르르 웃자, 진영은 자기도 따라서 웃었다.
“재밌지요? 안 그래요?”
“오빠, 이 오빠 되게 재밌다.”
선경은 준영의 어깨를 치며 더욱 깔깔댔다.
그런 선경에게서 진영의 눈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준영은 이 자리가 어색하기만 했다. 진영과 선경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정말로 몰랐었다. 뻘쭘한 기분에 그만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어? 형! 어디 가?”
“담배.”
진영은 자기도 담배를 피고 싶어, 일어났다가, 선경을 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형, 먼저 갔다 와. 나하고 교대.”
준영은 그런 진영을 내버려두고 혼자서 식당 밖으로 나왔다.
서울에서 아침부터 차를 타고, 인천까지 내리 달린 진영은 월미도까지 와서야 차를 세웠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맛집이 있다고 일행을 안내했다. 막상 도착한 식당은 간판부터가 수선스러워 보였다.
“형, 여기 회가 끝내줘.”
진영의 말대로 음식은 좋았으나, [최고 맛집! XXX 방영! 맛 없으면 돈 돌려 줌!] 이라고 크게 써있는 간판을 보자니, 준영은 담배 맛을 못 느낄 지경이었다.
‘저놈의 간판 좀 어떻게…….’
담배를 세 모금쯤 빨고 있으려니, 식당 문에서 진영이 나왔다. 진영은 준영을 툭 치더니, 배시시 웃었다.
“담배 하나 줘.”
준영은 진영에게 담배갑을 건넸고, 진영이 한 가치를 뽑자,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진영은 연기를 뿜어내더니, 다시 웃는다.
준영이 보기에 과하다 싶을만큼 기분을 내는 진영이었다.
“너, 오늘 이상하다.”
“형이야말로 이상해. 형한테 동생이면, 나한테도 동생이지?”
준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왜 그렇게 되냐?’
그러나 그 생각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모처럼 다들 기분이 좋은데, 망칠 필요는 없었다.
“형은 저런 이쁜 동생이 있으면서 그동안 말도 안 했다 이거지?”
준영은 기가 찼다.
“야! 너는 손혜정 씨나 잘 챙겨.”
끝내 준영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왔다.
“어? 형? 정말 이상하다.”
준영은 담배를 확 던지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 준영의 뒤에서 진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벨소리가 울리자 진영은 폰 화면을 확인했다.
‘손혜정’
준영도 옆에서 보았다.
‘역시 또 거절하겠지?’
그러나 준영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진영은 혜정의 전화를 쾌활히 받았다.
“혜정 씨! 어쩐 일입니까? 전화를 다 주시고…….”
준영은 선경을 이끌어 옆으로 피해주었다. 준영이 보니, 진영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오빠, 잘 지내지?”
선경은 준영의 얼굴을,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눈빛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준영은 선경에게 대답을 했다.
“잘 지내.”
“고민은 없어?’
준영은 씁쓰레 웃었다.
“왜 없겠냐?”
“뭔데?”
준영은 선경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실은 할 일이 없어. 그냥 집에서 죽치거나, 아니면 밖에서 술이나 마시지 뭐.”
“그래?’
선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제 27 살이 된 남자가 할 일이 없다니, 선경은 준영이 걱정되었다.
“오빠, 친부가 엄청 부자라면서? 거기 부탁하면…….”
준영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은 아니야. 나도 생각이 있어.”
전화를 끊은 진영이 다가왔다. 준영은 선경에게서 어깨동무를 풀었다.
“형, 다음에는 네 명이서 보재.”
준영은 진영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