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Gold)과 피(Blood)-19

by 윤금현

19 장.



“형! 형은 좋겠다.”

“뭐가?”

준영은 소파에 아주 늘어지게 기대며, 옆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이제 텔레비젼 방송도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그런 예쁜 동생이 있어서.”

준영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진영아, 이제 그만 자자.”

“아, 정말 선경 씨는 착하던데……. 평범하기까지 하고…….”

“나, 그만 들어간다.”

준영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형, 나는 말이야, 그런 평범하고 착한 여자가 좋아.”

진영은 어떤 환상을 보는 것처럼 주방 쪽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진영을 보는 준영의 마음에 묘한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거야 맘이지만, 너는 여자가 있잖아.

“형, 조금만 얘기할까?”

준영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어디 말해 봐.”

“참 어릴 때는 못 살았어. 형도 알겠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진짜 힘들었어. 친구들이 나이키니 아식스니 신고 다닐 때, 나는 월드컵 신고 다녔거든. 놀림받기도 하고……. 그런데 진짜 친구들이 놀리는 건 문제가 안 돼. 다른 애들의 눈초리가 나를 힘들게 했거든. 그래서 나는 사람에 대해서 아주 질린 적도 있어. 가난이 그렇게 만들어.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가 부자가 되니까, 예전에 나를 막 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달라졌어. 모임에 나가기라도 하면, 다들 쩔쩔맨단 말이야. 그게 돈의 힘이야.”

준영은 잠자코 진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렇게 돈이 없이 살지는 않았는데.’

준영은 양부가 공무원이라서 그렇게 부족한 생활을 하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공부도 적당히 하고, 더구나 싸움은 잘 했으니, 학창 시절엔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었다. 준영도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때, 못 사는 친구들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이제 진영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들이 이해가 되었다.

“형, 그래서 나는 말이야. 혜정 씨가 찬 성격인 것을 떠나서, 부잣집 딸인 것 자체가 싫어. 옛날에 얼마나 그렇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나 같은 애들한테 못되게 굴었을 거야.”

“야, 야. 그건 너무 나가는 거 아니냐? 내 보기엔 손혜정 씨는 좋은 사람 같던데…….”

진영은 준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럼, 형이 가지던지……. 어차피 우리야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유전자니까, 별 상관없잖아.”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준영은 너털웃음을 지었으나, 자기와 손혜정을 나란히 붙여놓고 상상을 해 보았다. 그리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진영과 혜정을 나란히 세워 놓았을 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어쨌든, 나는 선경 씨가 마음에 들어.”

“맘대로.”

준영은 리모컨을 소파에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준영의 뒷모습을 진영은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여보세요? 진영 씨?”

혜정은 논현동 빌라에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영 씨, 우리 오늘 보기로 했잖아?’

“맞다. 그랬지?”

“술 마셨어?”

혜정의 목소리가 뚱해졌다.

“어이구, 머리야.”

진영은 일부러 머리가 아픈 척을 했다.

“오늘 준영 씨랑 그 동생 선경인가 하는 아가씨랑 다같이 보기로 했는데…….”

그러나, 진영은 선경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정신 차렸어. 이따 저녁에……. 한 다섯 시 정도 어때?”

진영은 머릿속으로 시간 계산을 했다.

“좋아. 어디서 볼까?”

혜정은 선선히 승락했다.

“음, 그때 한식집 어때?”

“좋아요. 이따 봐요.”

혜정의 명랑한 목소리를 흘려 들으며, 진영은 전화를 끊었다.


* * *


“선경아, 오늘 시간 되지?”

“그럼, 어제부터 기다렸는걸.”

“그럼, 거기 강남역으로 와라. 내가 나갈께.”

“알았어. 오빠.”

준영은 선경에게 약속을 확인한 후, 진영을 보았다.

진영이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면서, 흐흐흐 하고 웃었다.


* * *


“야, 뭘 보냐? 이 새끼들이…….”

“야, 진영아, 왜 그러냐?”

“아니, 저것들이 눈을 부라리잖아.”

술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진영은 강남역 근처의 인도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어이, 너희들, 우리가 누군지 아냐?”

진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서 있던 남자들 중 한 명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진영이 윗도리를 벗고, 남자들 쪽으로 가려하자, 준영은 진영을 붙잡은 다음, 혜정을 보았다. 그러자 혜정이 다가와 진영을 잡았다. 그 후 준영은 천천히 네 명의 남자들에게 걸어갔다.

“조용히 가라.”

준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먹이 날아왔다. 준영은 살짝 피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발차기를 했다.

퍽!

"억!"

주먹을 질렀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뒤로 떨어졌다. 남은 세 명은 자세를 잡더니, 준영의 주위를 포위했다.

그들은 준영의 솜씨를 확실히 보았다. 한 두 번 싸워본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서자, 그들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졌다.

“너, 보통이 아니구나.”

세 명 중 준영의 바로 앞에 있는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를 내자, 준영은 좌우를 살며시 둘러보았다. 그들은 말로 시선을 끈 다음,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준영이 넘어가지 않자, 아직 치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너, 누구냐?”

준영은 생각을 했다. 여기서 싸우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이름을 대고 안 싸우는 쪽을 택할 것인가? 준영은 가드를 세우고 있던 두 주먹을 슬며시 내렸다.

“김상원이 아냐?”

세 남자의 얼굴빛이 변했다. 갑자기 말투가 달라졌다.

“상원이 형님하고 관계가 있습니까?”

“후후후.”

준영의 웃음이 끝나자마자, 왼쪽에서 발이 날아왔고, 준영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발차기를 흘려보낸 다음, 앞에 서 있던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였고, 상대가 피하는 것을 보면서 몸을 띄워 무릎으로 얼굴을 질러 버렸다. 준영의 장기이다. 허공에 뜨면서 공격하는 방법. 온 몸의 힘을 모아 그대로 부딪쳐 가면, 피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역시 비명 소리와 함께 상대는 그대로 인도의 포석에 나가떨어졌다. 이제 두 명 남았다. 준영은 반 바퀴를 돈 다음, 검도의 밀어걷기로 오른쪽에 서 있던 남자에게 다가가더니, 원 투 펀치를 날렸다. 이제 슬슬 진다는 마음이 든 상대는 무차별로 패면 된다. 한 번 마음이 얼어 붙으면, 몸도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왼쪽에서 발을 날렸던 남자를 살짝 보면서, 준영은 얼굴에 두 대를 맞고 흔들리는 상대를 연달아 주먹으로 때렸다. 역시 인도에 쓰러지고 만다. 이제 한 명. 준영은 허리를 쭉 편 다음, 홀로 남은 상대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슬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준영은 그 순간 확 다가갔다. 준영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뒤로 물러나더 남자는 스텝이 꼬이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준영은 다가가던 여세를 몰아, 그대로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상대는 인도에 쭉 뻗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인도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다들 그 자리에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준영은 진영을 보았고, 진영과 혜정 그리고 선경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 * *


“경찰입니다. 이진영 씨 댁이죠?”

“예. 그렇습니다만…….”

“이진영 씨가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빨리 오세요.”

현석은 전화를 끊고, 미현과 윤영을 바라보았다. 둘 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간다.


* * *


“아빠, 저에요.”

“오, 우리 딸, 뭔 일이지?”

“실은 진영 씨가 폭행 사건에 말려들었습니다.”

“뭐? 이제 싸움질이냐?”

진태는 한숨이 나왔다. 얼마 전에는 술과 여자 문제로 혜정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이제 싸움까지…….

“아빠, 그게 아니고,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그건 네 말이고. 그래, 아빠가 어떻게 해주랴?”


“현석이, 나 진태야.”

“전화올 줄 알았다. 나 지금 나가야 돼.”

“그래. 그럼 자네한테 부탁할께. 나까지 갈 필요는 없겠지?”

“없어. 내가 해결할 거야.”

“어떻게 된 일이야?”

“나도 잘 몰라.”


* * *


경찰서 한쪽에 이진영, 손혜정과 최선경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얼굴이며 옷이며 피가 묻어 있는 네 명의 남자들은 경찰관 앞에서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 최준영도 함께 있었다.

경찰서 문이 열리며, 송영구가 들어왔다.

“어, 실장님, 아빠는?”

혜정이 일어나며 영구를 맞았다. 왜 송영구가 왔을까 하는 표정이다.

“예. 손 회장님과 이 회장님이 통화를 하셨습니다. 제가 이 회장님께 집에 계시라고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제가 해결해야지요.”


송영구는 네 명 중 가장 서열이 높은 남자 한 명과 경찰서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꺼내 하나 주며 불도 붙여 주었다. 자신도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다음, 상대를 쳐다보았다.

“합의를 합시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침을 콘크리트 바닥에 찍 하고 뱉었다. 얼굴에 멍자국과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얼마 줄 거요?”

“천 만.”

영구는 변호사답게 간단히 말했다.

“두 당?”

“아니. 통으로.”

“쳇.”

“싫으면 말든가……. 소송해.”

송영구는 이런 사람들의 생리를 잘 알았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길게 끌면 끌수록, 뒤끝이 안 좋다는 것도 알았다. 여기서는 배짱 센 놈이 이기는 법이다.

남자는 영구의 소송하라는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알겠수다. 천 만으로 합시다.”

“오케이. 이거 내 명함이오.”

영구는 명함을 꺼내 남자의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그 번호로 전화를 하면……. 내일 합시다. 바로 입금해 주겠소.”


경찰서 문이 열리면서, 건장한 남자들 세 명이 들어왔다.

“어? 저거 최준영 아냐?”

준영은 자기 이름이 불리워지자,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서 사채업을 그만둘 때, 길거리에서 신나게 자신을 팼던 두 명의 얼굴을 확인했다. 준영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찰서에 들어오던 세 명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뒤로 송영구와 다른 한 남자가 들어왔다.

“형님들, 죄송합니다.”

영구와 대화를 했던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나중에 온 세 명에게 인사를 했으나, 세 명은 준영만 쳐다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고 모든 내용이 파악된 세 명은, 영구와 함께 들어온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했냐?”

“예, 형님.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명함을 꺼내 내밀자, 가운데의 남자가 그걸 받았다.


* * *


“선경아, 왜 이렇게 늦었냐?”

“아빠, 죄송해요. 그만 사고가 생겨서…….”

문을 열고 들어온 선경은 코가 쑥 빠져 있고, 어깨마저 처져 있었다.

“무슨 사고?”

“휴, 말하면 뭐해요. 남자들 술 먹고 시비 붙은 건데…….”

선경은 털석 소파에 주저앉았고, 주방에서 순화가 물 한 잔을 가져와서 선경에게 내밀었다.

“이거 좀 마셔라.”

선경은 순화가 주는 물을 마시면서 한숨 돌렸다.

“너, 경찰서 갔구나?”

종환의 눈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예.”

“그래 어떻게 되었냐?”

“준영 오빠가 다 패버려 가지고……. 난리가 났어. 그걸 진영 오빠네 변호사가 와서 돈으로 해결하던데…….”

“뭐? 준영이가 또 사고친 거야?”

종환은 한숨을 쉬었고, 순화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이고, 대체 왜 그런데?”

순화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아빠, 그게 아니야. 준영 오빠는 아무 잘못도 없어. 실은 진영 오빠, 누군지 알지? 그 쌍둥이 동생 말이야. 먼저 시비를 걸었거든. 술 취해가지고…….”

선경은 그 장면이 떠오른 듯, 눈살을 찌푸렸다.


* * *


“그럼, 들어가세요.”

송영구가 준영과 진영을 삼성동 빌라 앞에 내려주었다. 진영은 완전히 얼이 빠진 듯한 얼굴이었고, 준영 또한 표정이 안 좋았다.

“예. 실장님,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준영은 영구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혜정을 바라보았다.

혜정은 진영을 보면서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그냥 닫아버렸다.

“준영 씨, 진영 씨 좀 부탁해요.”

준영은 진영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님은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영구가 혜정을 돌아보며 말을 하자, 그제야 진영이 혜정을 보았다.

“진영 씨, 괜찮겠어?”

혜정의 말에 진영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끄덕거리기만 했다. 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준영의 사람 패는 것을 보고 질려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실장님, 혜정 씨 부탁합니다.”

결국 준영이 영구에게 부탁을 했고, 혜정은 영구의 차로 향했다. 삼성동 옆 논현동이니까, 차로 가면 10 분이면 도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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