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Gold)과 피(Blood)-20

by 윤금현

20 장.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먹구름이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면서, 기온이 차가워졌다.

김상원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최준영이 떠난지도 3 개월 정도 흘렀다. 상원은 가끔씩 준영 생각이 났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형님! 접니다.”

“무슨 일이냐?”

“최준영이를 봤습니다.”

상원은 준영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전화에서 준영 이야기가 나오자 섬뜩해졌다. 왠지 모르게 자기와는 그리 좋지 않은 끈으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서?”

“강남역 근처에서요. 어제 우리와 싸웠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시비가 붙어서…….”

전화기의 목소리는 주눅이 들어 있었고, 그만큼 상원의 화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최준영, 경찰서에 있냐?”

“아니오. 변호사가 와서 돈으로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최준영이……. 뭔진 몰라도 확 변했습니다.”

상원은 부하의 말에 의심이 생겼다.

“그래? 내가 좀 알아봐야겠다.”


* * *


진영은 비가 내리는 바깥을 보면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준영은 츄리닝 바람으로 그런 진영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싸움을 해결한 이후, 진영의 준영을 대하는 태도가 약간 변했다. 그전에는 그저 응석부리는 동생처럼 굴었으나, 그 일 이후로는 부쩍 어른스럽게 준영을 대한다.

“형, 오늘은 펜트하우스에서 하루 놀아보자.”

준영은 속으로 ‘네가 그럼 그렇지.’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또 호텔 가자는 거냐?”

“그래. 하루에 칠 백 만원이야. 거기서 하루 자는 것도 좋은 경험이지.”

“나는 싫다.”

준영은 진영의 머리 속에 좀 들어가 보고 싶었다. 왜 자꾸 나한테 그런 비싼 경험을 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왜 이래? 형도 좀 배워야 돼. 그래야 앞으로 사업을 하지, 안 그래?”

진영이 준영을 돌아보며, 상당히 진지한 말투로 말을 했다.

“알겠다.”

“선경이도 부르자.”

준영은 다시 속으로, ‘네가 그럼 그렇지. 내가 그 속을 모를 줄 아냐?’ 하였다.

“왜? 걔는 학교에서 바빠.”

준영의 거절에도 진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형, 선경이도 동생이잖아. 근사한 경험이 될 거야. 언제 또 해보겠어?”

“휴, 알았다.”

한 번 진영이 고집을 부리면, 준영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된 준영은 전화기를 끄집어 내어 선경의 번호를 찾았다.


* * *


“선경이냐? 오늘 오크우드 호텔에서 볼까?”

“난 거기 모르는데……. 그런데,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진영이가 펜트하우스에서 한 번 자 보잔다.”

“와! 펜트하우스! 좋기는 하지만……. 근데 나는 왜?”

선경의 기분이 올랐다가 바로 뚝 떨어졌다.

“아, 너한테 경험 시켜준다나……. 언제 호텔 펜트하우스에 가 보냐고 하더라.”

준영의 말투가 별로 신나게 들리지 않자, 선경도 풀이 죽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데…….”

선경은 핸드백을 어깨에 걸었다. 이제 출발해야지 학교에 늦지 않는다.

“그냥 와라. 내가 같이 있으니까.”

“그럼, 오빠 보러 가는 거다. 퇴근하고 갈께.”

“알았다.”

선경은 전화를 끊고, 방을 나와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순화에게 인사를 했다.

“잘 다녀와라.”

선경은 우산을 챙긴 다음, 문을 나가려다말고, 순화를 돌아보았다.

“엄마, 오늘 저녁 먹고 올께요. 두 분이서 드세요.”

“왜? 무슨 일 있냐?”

“예. 깜박 했어요. 학교에서 회식 있데요.”

선경은 준영 이야기를 순화에게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우리 점심 먹으러 먼저 갈까?”

“그러자. 예약은 했냐?”

“그럼. 내가 누구야? 점심 먹고 3 시에 들어가자. 펜트하우스여! 내가 간다!”

진영은 완전히 신났으나, 준영은 그리 신이 나지가 않았다. 지금 석 달 째 그냥저냥 놀고 먹고만 있었으니까. 이제 이 생활도 지겨워지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뭔가 할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진영은 준영에게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진영은 일 주일에 두 번씩 꼭꼭 회사에 나가서 아버지 이현석 회장에게 배우고 왔다. 준영은 가끔씩 그런 진영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형, 나가자.”

준영은 묵직한 몸을 일으켜 진영의 뒤를 따랐다.


* * *


“여보, 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회사에 찾아온 미현은 현석의 회장실에서 한참 바쁜 현석을 앞에 두고 아까부터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뭘?”

현석은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미현에게 대답했다.

“당신의 그 미적지근한 태도가 이제 싫어.”

미현의 수위가 폭발 직전까지 간 것 같았다.

“아, 그러니까 대체 왜 그래?”

마침내 현석이 고개를 들어 미현을 보았다.

“난 지금 당장 준영이를 보러 갈 거야.”

현석은 서류를 탁 하고 책상에 놓았다.

미현은 자기를 쏘아보는 현석의 눈길을 보자,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현석은 인터폰을 켜더니 비서를 불렀다.

“박 비서, 차 대기시켜.”

“예, 회장님.”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예쁜 목소리가 인터폰에서 흘러나왔다.


* * *


검은색 에쿠스 리무진이 골목길을 천천히 들어오더니, 웅장한 빌라 앞에 멈추었다. 경비실에서 젊은 남자가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뛰어 나오더니, 차 번호를 보고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주차장을 막고 있던 사이드바가 올라갔다. 리무진은 다시 천천히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현석과 미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 층에서 내렸다. 미현이 서둘러 진영의 빌라 문 앞으로 가더니 소리쳐 불렀다.

“진영아!”

그러나 빌라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띵동!

현석은 벨을 눌러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나 보네.”

“얘가 어디 간 거야?”

미현의 얼굴이 금세 실망으로 가득찼다. 전화기를 꺼내 든 미현은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진영아! 너 지금 어디냐?”

“엄마, 왜 그래?”

“빌라에 아무도 없어서 전화한 거야.”

“뭐, 거기 간 거야?”

“어디냐니까?”

미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크우드 호텔.”

미현은 현석을 돌아보았다. 작은 목소리로, “오크우드 호텔이라네요.” 하고 현석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도 같이 있는 거야?”

현석은 미현에게서 전화기를 빼았았다.

“진영아, 호텔은 뭐하러 갔냐? 이런 평일날……. 비도 오는데…….”

“예, 아빠. 그게 형이랑 같이 있어요. 상관없잖아요? 형도 이런 데 와봐야 하고…….”

“알았다. 그럼 둘이 잘 놀아라. 우리는 간다.”

“예.”

현석은 전화를 끊고, 미현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여보, 나, 가서 볼래요.”

미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보! 현석 씨!”

“내 생각으로는 시기가 안 좋아. 준영이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래야 돼. 생각해 봐. 갑자기 찾아가면 걔가 얼마나 놀라겠어? 왜 자기 생각만 하지?”

현석은 미현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여보, 난 이제 더 이상…….”

미현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곧 떨어질 것처럼 출렁거렸다.

이걸 본 현석은 혀를 찼다.

‘비도 오고, 눈물도 흘리고……. 이거 오늘 무슨 날이네.’

“할 수 없군. 진영이한테 다시 전화하지.”

미현은 현석의 손을 붙잡았다.

“안 돼!”

미현의 입에서 급박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랬다가……. 걔가 피하기라도 하면…….”

미현은 준영이 다른 데로 가 버릴까봐 그것이 걱정이 되었다.

현석은 미현을 살짝 껴안았다.

미현은 현석의 품 안에서 마치 참새 새끼가 떨듯이 덜덜 떨었다.


“형, 부모님이 전화하셨어.”

“들었다.”

“우리끼리 잘 놀라고 그러네?”

준영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준영은 전화에서 뭐라 다른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를 했었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내 얘기는 전혀 안 하네.’


* * *


쿵쿵!

“누구지?”

진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펜트하우스 현관문으로 갔다.

쿵쿵!

“누구세요?”

진영이 밖의 소리에 응하자, 곧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아빠다.”

그 순간 진영은 돌아보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거실에 앉아 있을 준영 생각을 했다.

‘먼저 말해야 하나?’

그러나 진영은 그냥 문을 열었고, 열린 문으로 미현이 들어왔다. 미현은 로비 복도를 두리번거리다가, 한쪽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들어갔다.

준영은 펜트하우스의 벽 장식이며, 멋진 가구들을 보면서, 거실 한 켠 다이닝 공간에서 식탁에 앉아 과자며 음료수들을 앞에 놓고 이것저것 집어먹고 있었다. 진영이 오늘은 옛날로 돌아가 보자고 하였기 때문에, 둘은 편의점에서 이런 것들을 사가지고 왔었다.

“준영아!”

준영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아니 입을 열어 뭐라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준영은 이제 두 번째로 듣는 목소리에 그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준영아.”

아까보다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준영은 천천히 일어나 뒤로 돌아,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펜트하우스 현관에 서 있던 현석은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돌아보았고, 거기에서 처음 보는 젊은 아가씨를 발견했다.

“아가씨는…….”

선경은 처음 보는 사람을 보자 약간 당황했으나, 그 바로 뒤에 진영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내 안심했다.

“안녕하세요?’

선경은 진영을 불렀고, 진영은 선경을 보았다.

현석은 둘의 눈빛을 보고,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다.


* * *


“저녁이 되니 비가 그쳤군.”

“이제 슬슬 추워질라 그래요.”

근사한 레스토랑의 원형 테이블에 손진태, 강정화 부부와 손병승, 김소희 쌍이 둘러 앉아 있다.

“자, 어디 우리 아들이 반한 아가씨 좀 볼까?”

진태의 말에 소희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여보, 대놓고 그런 말이 어딨어요?”

정화가 진태에게 눈짓을 했고, 옆에 앉아 있는 병승은 아무 말도 없이 소희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