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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민 Apr 11. 2023

강릉을 집어삼킨 '붉은 바람'

공포의 불춤 8시간, 고마운 단비로 불은 꺼졌지만 잿더미 된 보금자리 

평화롭던 화요일 오전 8시 반 강원도 강릉.

난곡동 야산에 불이 붙었다. 

작은 불꽃에서 시작된 화염은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번졌다.


불길은 경포호와 사근진 해수욕장 일대 바닷가로 향했다.

하늘엔 온통 시커먼 잿빛 연기구름. 

경포호 건너편에서 바라본 습지공원은 불바다였다.



도로는 양쪽 산에서 번져오는 화마로 인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

급기야 불도깨비는 민가를 덮쳤다. 

누군가의 보금자리 수십 채를 순식간에 불태웠다.

한평생 일궈 세운 펜션도 화마를 비켜가지 못했다.

건물이 통째로 활활 타올랐다. 



경포호 일대 호텔 투숙객들은 급히 몸만 빠져나왔다.

주민들도 발만 동동 굴렀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옷가지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빠져나왔다.



한 60대 여성 주민은 "질식할 것 같아서 불 속을 빠져나왔어요. 같이 못 나온 우리 집 양반이 소식이 끊겼어요"라며 울먹였다.


대응 1단계는 한 시간 만에 2단계를 거쳐 3단계로 상향 조정됐다. 

소방지휘권이 김진태 강원도지사에게로 넘어갔다.

긴박하고 엄중한 순간이었다. 


그보다 먼저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다. 

주민 3백여 명이 강릉아레나로, 사천중학교 체육관으로, 초당초등학교로 몸을 피했다.

두려움에 떨었다. 



무시무시한 불이 어디로 향할지, 불춤이 어느 마을을 또 덮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바람 탓이었다. 

순간 최대 풍속 30미터, 1초에 30미터를 이동하는 태풍급 강풍이 불도깨비를 이곳저곳으로 실어 날랐다. 

평균 초속 20미터의 강풍은 태풍 때나 부는 바람이다.

어른이 서서 버티기 힘든 거친 바람이다. 



이런 강풍은 진화헬기조차 뜨지 못하게 만들었다.

거칠고 얄궂은 바람 탓에 불길은 여러 갈래로 불기둥을 몰고 다니며 도심까지 위협했다. 

무서운 산불의 최초 원인제공자도 바람이었다. 

강한 바람에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전봇대를 건드렸고 이때 발생한 스파크가 불씨가 된 것이다. 

소나무 숲은 불쏘시개가 되었고 천 개의 바람을 타고 인간을 위협했다.


오후 3시 무렵 강릉 일대에 소나기가 뿌렸다. 

예보됐던 5밀리를 넘은 듯 제법 쏟아졌다.

진화 헬기 천여 대가 동시에 출동한 것과 같은 효과였다. 

당국은 오후 4시 반 진화율 100%라고 발표했다. 

정말 고마운 비였다. 


불춤의 공포는 8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화마가 덮치고 간 곳은 모든 게 폐허로 변했다. 

앙상한 잔해물만 남긴 채 원래 있던 보금자리와 일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망연자실. 눈물을 삼켰다. 



다 타버린 주택에서는 싸늘한 주검이 발견되었다. 

화마란 놈이 인간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산림도 축구장 530개 면적이 잿더미가 됐다.


이 숲이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면 최소 30년에서 백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해마다 봄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붉은 바람'

자연재난의 위력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또 한 번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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