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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Apr 07. 2023

‘선과 악’

고통은 악인의 몫

(4/6, 목) 유시민처럼 글쓰기 4일 차(722) / <청춘의 독서>(웅진지식하우스, 2011)(p.27)


*필사하기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면하지 못하는 게 삶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른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따지는 것은,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연역적 논리적인 추론의 산물이 아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보고 체험한 끝에 얻은 경험적, 직관적인 판단이다.



*바꿔 쓰기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죄와 벌>을 쓴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면하지 못하는 게 삶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명제가 전제부터 잘못되었다고 본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따지는 것은,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 어디 정당성만으로 선악이 판단이 되던가? 이것은 어떤 연역적 논리적인 추론이 불가능하다. 선과 악, 그리고 목적과 수단. 이것의 실체는 우리가 살면서 얻은 경험적, 직관적인 판단한다.



*단상 쓰기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언론인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당신에게 한 번 묻는다. ‘악’이 뭘까요?

당신은 학대, 살해 등 개인이나 집단을 향한 폭력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묻는다 ‘선善’은 뭘까요?

착하고 어질다? 도덕적 양심? 최고의 이상? 애매모호한 단어다. 그래서 ‘악’은 명백하지만 ‘선’은 애매하기 때문에 그럴듯한 명분만 있다면 어떤 것도 ‘선’으로 포장할 수 있다. 그래서 최고의 이상이고 목표여야 할 ‘선’은 많은 경우 명분, 즉 수단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 논리의 가장 적절한 사례는 최근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 씨의 행보일 것이다. 어떤 집단에게는 국가 체제의 유지를 위한 최선善이었을 5.18 광주 학살은 ‘선악’을 모르던 이들, 삶에서 선악을 따져볼 일도 없었을 수많은 시민들을 ‘악인’으로 만들었다. 계엄군이었던 형을 혁명군 아우를 쏜 ‘살인자’로 만들었다. 그 소식을 뒤늦게 듣게 된 국민 모두를 ‘방관자’로 만들었다. 양심의 가책으로 평생 정상과 비정상 사이 살얼음판을 걷던 사람을 ‘배신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전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돼!’ 주의이다.집단적 폭력에는 서로를 향한 선과 악이 뒤엉킨 것 같아보이지만, 선과 악으로 따질 일이 아니다. 사실은 “누가 더 강한가? 누가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해관계의 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선과 악의 프레임을 사용하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을 보면 그 가면을 벗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는다.

 ‘선과 악’이란 말을 ‘이해관계’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면 그 혼란스러움을 혐오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관찰해 보게 된다. 한정된 자원에서 이해관계는 당연하기에 잠시 혐오를 멈춰보게 된다. 이 이론은 나의 ‘선과 악’에 대한 “연역적 논리적인 추론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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