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의 어느 날, 나는 홍대입구역 9번 출구에서 입사 후 두 번째 미팅을 위해 회사 여동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이었던 그날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게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나는 15분 전에 도착해서 혼자였다. 그런데 그때, 9번 출구에서 낯이 익은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고 내 머릿속에서는 저 사람이 누구였지 하는 추리가 0.1초 정도 진행되었다. 그는 바로 일주일 전 내 입사 후 첫 번째 미팅 때 참석했던 남자 중 한 명이었다.
‘세상에나, 오 마이 갓. 이렇게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숨어야 해’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나를 보았고 환한 잇몸 미소를 보이며 내게 다가왔다.
“여기서 뭐하노.”
“아… 나 친구들 만나러 왔어.”
“그래, 재밌게 놀아라.”
10초의 만남을 가진 뒤 헤어졌고 몇 분 후 동기들을 모두 만난 뒤 미팅 장소로 갔다.
이 우연한 만남에 대해 첫 번째, 두 번째 미팅에 모두 참석했던 동기한테 이야기했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야, 너 그 오빠 랑 인연인가 봐.”
“무슨 소리야, 미팅 이후로 연락해 본 적도 없는데.”라고 말했다.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그 홍대 9번 출구남은 지금 나의 남편이다.
그를 만나게 된 미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만나 1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엄청난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나의 여자 동기들. 그 당시 20대 초중반이었던 우리들은 우리끼리 놀러 다니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도 책 한 권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즐겁게 놀았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우리들끼리만 즐겁게 놀다가는 연애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올해는 미팅을 해보자 라며 갑자기 결의를 다졌더라는 것. 그렇게 2009년 우리의 미팅 플랜이 시작되었다.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우리 멤버 중 한 명이 부서 선배한테 미팅을 의뢰했고 바로 다음 날 미팅이 잡혔다. 그렇게 첫 번째 미팅이 시작되었다.
그날은 목요일이었고 미팅 장소는 ‘강남역 와라와라’였다. 얼마나 가벼운 마음으로 미팅 스타트를 끊었는지 미팅 상대방은 무려 ‘대학생’이었다. 대학생이어도 나한테는 오빠인 그런 상대방들이었다. 4대 4 미팅이어서 우리 측에서는 네 명이 나갔는데 상대방보다 나이 한 살이 많았던 언니는 누나인 것이 싫다며 나이도 한 살 어리게 속여서 나갔던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던 미팅이었다.
퇴근하고 꽉 막힌 도로를 뚫고 미팅 장소에 도착했는데, 역시나 학생이었던 그들은 일찍 도착해서 장소에 나와있었다. 그들은 정말 유쾌했다. 몇 분만에 말을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고 소지품으로 파트너도 정하고 게임도 하며 전형적인 미팅 분위기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유쾌한 분위기에서 상대방 말에 웃기만 하고 본인은 거의 말도 안 하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굉장히 내성적으로 보였는데 1차 때 왠지 자꾸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었다. 주황색 크로스백을 메고 있는 남자였는데 얼굴이 굉장히 작고 마른 스타일의 남자였다. ‘얼굴은 나쁘지 않은데 역시 너무 소심해 보이네’.라고 그때 느꼈던 감상평(?)을 적어본다.
시끌벅적하게 놀고 2차로 이동했다. 남자 측에서는 이미 한 명이 집으로 귀가했던 때였다. 이동해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 소심남이 내 옆자리에 바로 앉았다. 1차 때 한마디도 안 했던 그 남자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밴드도 해.”
뭐야.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나는 오케스트라 해.”
남자가 눈이 커지면서 말한다.
“그래? 내가 무슨 악기 하는지 맞춰볼게.”
이게 뭐라고 정말 고민 고민하다가 나한테 말한다.
“첼로”
“어? 맞아.”
맞추더니 뛸 듯이 기뻐한다. 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나 좋아하고 집중하다니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본인은 베이스 기타를 연주한다고 덧붙였다. 베이스 기타라니… 낮은음 소리를 좋아하는 나는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
미팅 이후 홍대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나서도 딱히 연락이 없다가 3주 정도 지난 뒤에 회사 선배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 남자가 내 연락처를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시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사실. 그는 편입 준비생이었다. 취업 준비생도 아니고 편입 준비생. 당시 25살이었던 나는 골치 아픈 것은 미래에 생각하기로 하자 하고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를 따라 인디밴드 공연도 보고 독립영화도 보고 와인도 마셔보며 그의 취향을 나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힘든 회사 생활 중 그와의 데이트는 나에게 큰 힐링이 되었다. 그는 모든 일에 심각하게 반응하는 적이 없었으며 항상 긍정적이고 현재를 즐기며 살자는 주의였다. 여태까지 미래를 걱정하고 대비하며 쉼 없이 살아왔던 나에게 그는 마치 서프라이즈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느낌이었다.
편입 준비생과 3년 차 직장인이었던 우리가 연애하면서 얼마나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을지 아마 짐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그를 만날 때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스펙(?) 따위는 안 봤다는 것. 사람 자체가 좋았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고 4년 가까운 연애 기간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했다.
결혼 후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가 한국에 들어와서 남편을 처음으로 소개해 주는 자리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였다. 친구가 남편을 보자마자 말했다.
“와, 네가 고등학생 때 말했던 니 이상형이야.”
어머? 나 어릴 때부터 꿈꿔온 이상형과 결혼한 거야? 역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