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술친구여
사람들이 여행을 가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누구는 휴식을 취하러, 누구는 관광 명소를 보러 다니러, 누구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하여. 우리 부부는 여행을 가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 바로 술을 마시기 위해서다.
“한국에서도 마실 수 있는 술을 마시러 여행까지 가?”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도 묻고 싶다. 집에서도 쉴 수 있는데 왜 휴식을 취하러 동남아 휴양지를 가냐고.
그렇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지.
“분위기가 다르잖아.”
그럼 나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술 마시는 분위기가 다르잖아.”
언젠가 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부부가 음주 습관이 비슷하면 이혼할 확률이 낮아진다고. 둘 다 많이 마시거나 둘 다 안 마시면 이혼율이 낮아진다는 것인데 읽자마자 공감이 갔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는 음주를 전혀 안 하는 사람인데 남편이 매일매일 음주를 하고 들어오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술을 마시고 심지어 여행 가서도 맛있는 술만 찾아다닌다면 싸움거리가 정말 많아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술을 전혀 안 마시는 남편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조금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부부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음주 습관 말고도 복잡한 여러 가지 생활 습관이나 가치관의 차이, 경제력의 차이, 양가 집안 분위기 등이 그렇다. 주말 아침에 일어나서 집 정리를 먼저 하냐, TV를 먼저 켜냐, 페미니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가 월급을 얼마나 더 받는지, 남자는 절대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집안 분위기가 있는지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 말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해서는 한 꼭지로 따로 적어보고 싶다.
연애 시절, 우리는 와인을 사서 공원에서 돗자리를 펴고 마시는 데이트를 즐겨서 했다. 밝은 대낮에 와인을 마시는 게 뭔가 이상했지만 색다르고 좋았다. 특히 남편이 (그 당시엔 남친) 사온 와인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것이 좋았다. 2009년 당시에는 와인을 다가가기 힘든 술이라고 생각해서 샵에서 추천해 주는 와인만 마셔봤었는데, 남편은 본인이 와인을 직접 고르고 품종에 대해서 짧게나마 설명해 주는 것이 굉장히 색달랐던 것이다. 공원에서 간단하게 와인을 마시고 근처 펍에서 한 잔 더, 그다음 펍으로 가서 한 잔 더 하며 우리 둘이서 1,2,3차를 하는 식으로 술을 마셨다. 남편과 내가 둘도 없는 술친구가 된 것이다.
이 느낌은 상당히 좋았는데, 왜냐하면 전남친은 술을 친구들 이랑만 마셨기 때문이다. 항상 나랑 데이트를 마치고 친구들과 하는 술자리에 합류하는 식이었다. 나도 술을 좋아하는데… 그렇지만 남편은 데이트를 마치고 나와 꼭 술도 같이 마셨다. 하루 일정을 나와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나는 전남친 생활의 일부였던 것 같았다면, 남편에게 나는 생활의 전부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혼 후 한동안 수제 맥주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었다. 요새 들어서야 수제 맥주가 보편적이 되어서 마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가 빠졌던 2013년에는 이태원이나 홍대에 조금씩 수제 맥주 펍이 생겨나던 때 여서 서울 다른 지역에 가면 수제 맥주를 파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이제 막 시작되던 때였다. 퇴근하고 와서 피곤할 때에도 냉장고에 수제 맥주가 떨어지면 둘이 차를 몰고 이태원까지 가서 꼭 맥주 몇 병을 사 오곤 했다. 지금이야 조금 저렴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수입 수제 맥주만 있었어서 꽤 비쌌었다. 우리는 돈 벌면 수제 맥주 사다 마시고 수제 맥주 펍 찾아다니는 부부였다. 해외여행 가서도 로컬 수제 맥주를 찾아다니고 여행 중 점심, 저녁에도 항상 수제 맥주를 곁들였다. 심지어 브루어리 투어를 일부러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끔 이렇게 술에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인가 싶었지만 사실 난 술 말고는 딱히 돈 쓰는 곳도 없었다. 명품가방 같은 건 관심조차 없고 옷 쇼핑도 매우 귀찮아해서 남편이 잡아끌고 제발 옷 좀 사라고 해야 사는 조금은 특이한 사람이다.
최근에는 내추럴 와인에 꽂혀 있다. 2017년 내 생일, 처음으로 내추럴 와인을 마셔봤다. 그 전에도 아마 우리도 모르는 사이 내추럴 와인을 마셨을지도 모르겠으나 내추럴 와인이라고 정확하게 알고 마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셨을 당시에는 워낙 우리가 컨벤셔널 와인 맛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 내추럴 와인이란 것은 좀 밍밍하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다가 2018년 남편 생일에 맞춰 와인 시음회를 예약해 놓은 곳에서 우리의 입맛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시음해 주시는 분이 이 와인은 모두 내추럴 와인이라고 했고 비교 테이스팅을 해보며 우리는 완전히 내추럴 와인에 빠져버린 것이다. (여기서 잠깐, 내추럴 와인이란? 포도를 재배하거나 와인을 양조하는 과정에서 무엇도 첨가하지 않고 만드는 와인을 말한다.) 그동안 마셔왔던 컨벤셔널 와인에서 느꼈던 익숙한 향과 맛이 결국은 여러 첨가제로 인해 발생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코 다시는 컨벤셔널 와인을 마시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고 동시에 내추럴 와인으로 재산을 탕진할 것 같다는 슬픈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 이 이후로 또 우리는 내추럴 와인이 저렴한 곳으로 여행을 찾아다닌다. 하루 종일 와인만 마시다 왔던 여행도 있고 남편은 출장 가서 저녁 시간에 혼자 내추럴 와인바에 가서 여러 와인을 마셔본다. 다행인 것은 술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 둘 다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폭주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내가 제지를 할 때도 있다. 이러다 정말 재산을 탕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난히 고생한 하루가 지난날, 기념일, 또는 그냥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좋은 내추럴 와인 한 잔은 우리 부부에게는 필수적인 습관이 되어 버렸다.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이 사람은 나의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