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없이 7년째 살고 있는 부부입니다.
이 전 글에서 최악의 경험만 적어 놓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아르헨티나 여행 중 가장 좋았던 경험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세상의 끝이라는 아르헨티나 최남단 우수아이아에 갔을 때였다. 사실 우리는 아르헨티나 겨울에 방문했던 터라 너무 추웠어서 우수아이아 자체의 느낌은 좋은 편은 아니었었다. 한인민박인 ‘다빈이네’라는 곳에 숙소를 잡았는데 호스텔이라 같은 방에 여러 명이 자야 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비수기라서 우리 밖에 손님이 없었다. 짐을 풀고 우수아이아 마을을 둘러보고 100년이 넘었다는 카페에서 맥주도 마시고 여유를 즐겼다. 추워서 하루 일정을 일찍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고 저녁은 간단하게 장 봐서 숙소에서 먹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트에 갔더니 마트 한편에 와인이 정말 많았다. 전부다 아르헨티나산 와인이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와인을 많이 마셔서 대부분 내수로 다 소진된다던 아르헨티나 와인. 와인 가격도 정말 싸서 2만 원 정도의 와인을 고르면 우리나라에서 5-6만 원짜리 와인 퀄리티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2만 원짜리 와인이 우리나라에 오면 5-6만 원 정도 되겠지.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고심 고심해서 와인 한 병을 고르고 파스타 재료와 남편이 먹을 스테이크 고기까지 사서 숙소에 왔다.
숙소에 왔더니 그 조그마한 숙소에 우리 밖에 없어 정말 조용했고 밖은 정말 깜깜했다. 서울에서는 밤에도 소음이 있고 빌딩, 도로의 불빛 때문에 깜깜하다는 느낌을 못 받았었고 아르헨티나 여행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도시에 도착해서 바로 우수아이아로 넘어왔기 때문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고요함에 왠지 설레고 정말 지구 반대편에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고요한 장소에서 남편과 단둘이 식사를 하면서 무인도에 와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와인은 맛있었으며 남편표 파스타도 정말 맛있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음악을 틀지 않아도 고요함 자체가 듣기 좋은 음악이 된 것만 같았던 그때 그 분위기. 서울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날의 분위기가 아직도 난 기억이 난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에서 봤던 빙하보다 바릴로체에서 봤던 아름다운 호수보다 더 기억이 나는 추억이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멘도사라는 지역이 아마 친근할 듯. 멘도사는 아르헨티나 와인 최대 산지이다. 우리나라에서 아르헨티나 와인 주세요. 하면 아마 멘도사 지역의 와인을 받을 확률이 99% 이상일 것이다. (개인적 통계입니다.) 와인을 좋아하다 못해 진심으로 사랑하는 우리 부부는 멘도사에서 마실 와인에 한껏 설렜다.
멘도사에서 묵었던 숙소는 호스트 집에 한 방을 쓰는 구조였던 에어비앤비 숙소. 고양이를 좋아하는 쾌활한 성격의 그녀는 이름이 ‘발(Val)’이었고, 청소년기로 보이는 예쁜 고양이 ‘부피(Buffy)’와 새끼 고양이 세 마리와 동거 중이었다. (Buffy를 영어식으로 읽는다면 ‘버피’이겠으나 스페인식으로 읽으면 부피가 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부피라고 적기로 했다.) 멘도사의 좋은 기억 중 30%는 고양이 부피가 준 것이었는데 어찌나 친근하고 소위 말하는 개냥이 인지, 우리 방문 앞에서 냐옹 냐옹 하다가 우리가 방문을 열어주면 능청스럽게 침대 위로 쏙 올라와서 골골 송을 불러 대는 것이었다. 아, 지금도 보고 싶다. 부피.
다시 와인으로 돌아와서, 늦은 저녁에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발이 우리에게 내일은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우리는 동시에 “와인!”이라고 외쳤고 발은 우리에게 그럼 좋은 와이너리 투어를 예약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 전형적인 투어버스가 와서 우리를 태우고 와이너리 투어를 시켜주었다. 열댓 명 남짓의 투어 인원에서 동양인은 물론 우리뿐이었다. 와이너리뿐 아니라 올리브 농장도 가보았다. 뭔가 패키지 투어의 투어+기념품 쇼핑 느낌이었다.
그 투어는 괜찮았으나 우리의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이크 투어를 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와이너리가 많은 곳까지 가서 바이크를 빌려서 가고 싶은 와이너리에 가며 테이스팅을 해보는 투어이다. 그런데 웬걸, 바이크는 이제 빌릴 수 없다고 한다. (2016년 기준)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고 바이크를 운전해서 사고가 많이 나서 안전상의 이유로 없어졌다는 것이다. 남편 뒷자리에 타고 편하게 투어를 하려던 계획은 틀어졌다.
대신, 자전거 투어는 가능했다. 자전거만 타면 날아다니며 몇십 킬로씩 가는 남편을 따라다니며 하는 투어가 너무 고생스러울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전거를 빌리고 자전거 샵에서 준 와이너리 위치 지도를 보며 출발했다.
자갈길, 가끔씩 쌩쌩 거리며 차가 오는 일 차선 도로, 흙 길을 달리고 달려 가장 멀어 보였던 부티크 와이너리 MEVI에 도착했다. 도착했더니 투어 프로그램 같은 것 따위는 없어 보였던 굉장히 작은 와이너리였고 그냥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설렁설렁 걸어 나와 투어 왔냐 묻고 3잔짜리 고급 와인 테이스팅과 5잔짜리 중저가 와인 테이스팅이 있다고 이야기하셨다. 우리는 3잔짜리 테이스팅을 골랐다.
한 모금하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때 와인의 맛은 솔직히 말해서 상세하게 기억은 안 난다. 사실 난 이 전 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남편이 비싼 와인을 고를 때마다 와인 맛이 거기서 거기지 하며 타박을 주던 아내였다. 그런데 이때 마셨던 와인은 여태까지 마트 할인 행사할 때 마셨던 와인이랑은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맛있었다. 심지어 세 잔 테이스팅 가격이 일인당 4천 원 정도였다. (2016년 기준) 이렇게 좋은 와인을 저렴한 가격에 매일 마실 수 있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정말 부러웠다.
이 와이너리에서 나와 대형 와이너리를 두 군데 더 방문했다. 그 두 곳은 투어 프로그램이 아주 잘되어 있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워낙 멘도사 지역이 크고 자전거로 이동하는데 한계가 있어 세 군데 와이너리 투어를 마치고 자전거를 반납하고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도 그 작은 와이너리에서 조용히 둘이 포도밭을 바라보며 와인 테이스팅 하던 순간이 생각난다. 적고 보니 좋았던 기억 둘 다 부부 둘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낸 기억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최악의 기억 또한 다른 사람이 엮이지 않은 둘이서 겪은 일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이 전 글에서 시작했듯이, 한 달 여행이 우리 부부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24시간 내내 한 달 이상을 붙어있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여행을 하며 4년 가까이 연애하고 결혼 후 4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남편과 더욱 단단해졌다는 느낌을 받았고, 우리가 평생 이야기할 수 있는 값진 추억이 생겼으며, 이 사람과 24시간 붙어있어도 하루에 대부분의 시간을 못 만났던 회사를 다니는 시절과 마찬가지로 애틋하게 생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 이 사람은 나의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