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습관으로 만들어준 시인 메리 올리버

기록은 내가 새긴 하나의 신비한 문

by 윤슬

나는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하루를 기록하는 일상적인 일기뿐만 아니라 그날의 감정과 생각을 분리해서 기록하는 감정 일기도 있고, 그날의 독서를 기반으로 한 생각을 적는 독서 일기도 있다. 올해부터는 하루를 다섯 줄로 요약해서 5년간 모으는 5년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시간대별로 기록하기도 하고 일기장에 영수증을 붙이기도 한다. 특히 가장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아끼는 기록장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아이디어 수첩과 A8 사이즈의 작업 노트다. 여기에는 무작위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떠오른 단상이나 들은 것, 본 것 등을 쓰고 있다. 이러한 기록 습관이 생긴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시인 메리 올리버가 쓴 산문집 『긴 호흡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시인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다정함 그리고 표현력에 굉장히 감탄했고, 시인들을 동경하게 되었다. 『천 개의 아침』을 읽고 난 뒤엔 낯설기만 하던 시집을 스스로 펼치게 되었다. 그만큼 대단히 좋아하는 시인이다. 그런데 이 분이 늘 뒷주머니에 수첩을 꽂고 다녔다는 내용이 『긴 호흡』에 근사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30년 넘게 거의 늘 뒷주머니에 공책을 넣고 다닌다. 항상 가로 3인치, 세로 5인치의 작은 크기에 손으로 꿰매어 만든 같은 종류의 공책이다. 이 공책에 시를 쓰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결국 시에 등장하게 될 문구들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이 공책들은 내 시의 시작인 셈이다.”


나는 마치 신묘한 비기를 발견한 사람마냥 작은 사이즈의 기록장을 구입해서 몸에 지니고 다녔다. (처음엔 당연히 메리 올리버처럼 뒷주머니에 끼우고 다녔다.)


“나는 공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무질서하게 사용한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 대로 쓴다.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공책이 제법 차면 다른 공책으로 바꾼다. 특히 봄과 가을에 쓴 공책에는 글씨가 번져서 읽기 힘든 페이지들이 있다. 봄과 가을은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인 데다 거의 모든 기록이 야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했던 방법 그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메모를 남기는 습관을 갖게 됐다. 여기서부터 내 일기와 모든 기록이 시작되었다. 이제 그 조그만 수첩과 작업 노트가 없으면 희곡도, 소설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저 단어나 문장 몇 개가 적혀 있을 뿐인데.


“공책에 적힌 문구나 아이디어 가운데 일부는 영영 완성된 산문이나 시로 도약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나의 무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갈고닦지 않거나, 나의 의식에게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일시적이거나 덧없는 이치를 담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어쩌면 추운 날 뿌리는 씨앗일 수도 있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하나의 아이디어는 채택되기 전에 여러 문구들에 등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적힌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서 실제로 작업이 되는 아이디어는 몇 가지 없다. 그럼에도 모든 메모가 의미를 남긴다. 언젠가 다른 아이디어나 단어끼리 충돌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발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모해 둔 단어나 문장을 읽으면 어느새 아이디어를 기록했던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재미도 있기 때문에 기록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크다. 이런 감각을 메리 올리버는 다음과 같이 적확하게 표현했다.


“속기나 문구는 모두 기록한 순간과 장소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이건 매우 엄밀한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기록은 그게 무엇이든 내가 그걸 쓴 이유가 아닌 느낌의 체험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건 중요하다. 그러면 나는 그 아이디어, 곧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기보다는 아이디어가 나오기 이전부터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공책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건 논평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 순간이다.”


매일 같은 일상만 반복되는 것 같은 착각을 흔히 하는 현대인들이 기록을 남기고 그 기록을 다시 보는 일이 얼마나 재밌는 사건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기록 그 자체가 일상의 기쁨과 소중함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휘몰아치듯 지나가버린 순간과 감각을 간직해 주며, 그때 그 시간, 그 장소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내가 새긴 하나의 신비한 문이고, 그 문을 열면 한 번 살았던 삶을 다시 한번 체험하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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