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한 하루

by 윤슬

잠에서 깼을 때 이불속은 따뜻했고 전기장판의 온도가 딱 알맞았다. 온몸이 노곤노곤해서 잠을 더 자고 싶었다. 푹 쪄진 찐빵처럼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 같았고 직전에 꾼 꿈이 생생했다. 오후 12시가 좀 지나있었다. 뻐근하던 허리 통증이 사라졌고 기분도 좋았다. 순두부찌개에 밥을 먹으니 입에서 후하후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씻고 나와서 헤어드라이어를 켰다. 뜨끈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릴스를 봤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감이었는데, 마음속에서 굴리고 있는 세 편의 책을 쓰고 싶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나도 마음속으로 장편 소설을 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달 안에 꼭 새 작품을 시작하겠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희망이라는 숯에 잔잔하게 불이 붙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한파라고 하니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올려 잠그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갔다. 요즘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아트박스로 걸어서 출근했다.


오늘은 물건 진열을 하면서 귀여운 키링을 많이 봤다. 산리오 실버 버전이라든가 복슬복슬한 초미니 인형이라든가 각종 네잎클로버 같은 것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행운 부적의 종류가 참 많다는 것이었다. 행운과 기적이 필요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건지. 거기다 위로의 문장을 넘어서서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의 문장이나 해내야 한다는 결연함 혹은 그냥 산다 같은 초연함을 드러내는 문장이 새겨진 키링을 보니 이 사회를 살아내고 견뎌내는 것이 누구에게든 쉽지 않은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키링들을 보면서 최근에 직장에서 마음의 부담을 크게 짊어지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 계단을 올라섰을 뿐인데 아득해져 버린 발 밑. 새로워진 풍경을 감당해야 하는 친구에게 손에 꼭 쥐면 경직된 마음을 풀어줄 만한 온기를 품은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몇 개의 벽면을 가득 채운 그 많은 키링들. 유쾌하고 따뜻한 문장들. 작은 이목구비들. 가벼운 것들. 그 많은 면면들을 바라만 보다가 끝내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다. 아무것도 고르지 못해서 내가 친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을 친구는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럼 그 마음은 애초에 없는 마음과 같아져 버린 걸까. 결과가 같기 때문에? 출발했으나 도착하지 않은 마음은 다 어디로 흩어져버리는 걸까.


지난주에는 빗자루질을 할 때마다 허리와 고관절이 아팠는데 오늘은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무리 없이 청소를 마치고 자진해서 진열된 물건들을 정리했다. 피규어 박스를 정확하게 줄 맞춰 정돈하는 일은 항상 마음에 안정을 준다. 퇴근하고 매장 옆에 있는 만두집에서 떡만둣국을 먹은 뒤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딸기라떼를 마시며 써 내려간 무탈한 하루.

충분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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