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되기로 선택한 삶에 대해

글을 쓰는 삶

by 윤슬

문장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지는 꿈을 꿨다. 펜으로 손바닥에 어떤 문장을 적어 내려갔는데 손바닥을 다시 들여다봤을 때는 이미 지워져 있었다. 다시 적고 지워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적기를 반복하다가 잠에서 깼다. 읽어야 하는 단편 소설이 쌓여있었다. 새로운 단편 소설 구상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꾼건가. 내게서 미끄러지는 문장. 늘 처음인양 어색하고 어려운 쓰기라는 세계. 오늘은 그 세계의 문턱을 넘을 수 있으려나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김연수 소설가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펼쳤다. 읽었던 소설집이라 후루룩 페이지를 넘기다가 길게 쳐진 밑줄에서 멈췄다.


“윤경의 서가에서 가족을 떠나 혼자 살면서 그녀가 쓴 몇십 권의 책들을 바라보며 영범은, 그런 점에서 자신의 엄마는 오히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산 셈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적어도 윤경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고, 끝까지 그 삶을 살아냈으니까. 그건 광원의 삶과 같았다. 광원이란 스스로 빛날 뿐이지, 그 빛으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까지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광원의 삶, 즉 빛이 되기로 선택한 삶이 무엇인지 상상해봤다. 책을 쓰기로 선택한 삶이 어째서 광원의 삶이 된 것인지.


아마도 광원이 된다는 건 오래 마주한 어둠을 밀어내는 일일 것이다. 광막한 우주에서 먼지들이 모여 별로 거듭나듯이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로 거듭나는 일.


그렇다면 가진 모든 것을 태워서라도 광원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래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 만약 빛이 되는 대가로 생기는 그림자까지 신경 써야 했다면 빛은 빛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극장에서 조명을 설치할 때 무대 위에 서서 강한 조명을 받은 적이 있다. 강렬한 조명이 내게 향해 있을 때 객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명을 바라보느라 내 등뒤로 늘어지는 그림자를 돌아볼 생각도 한 적이 없다. 빛을 받는 것도 그러한데 아예 빛이 되는 건 어떠할까. 빛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겠지만 만약 여전히 존재하는 어둠을, 생겨나는 그림자를 식별하더라도 그곳들을 밝히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일 것이다. 어떻게 해도 그들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므로. 스스로 빛이 되기로 선택한 이상. 그림자를 만들더라도 광원은 온 에너지를 다해 빛을 생산해야만 한다. 생산을 멈추는 순간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느낄 것이므로.


결국 빛이 되기로 선택한 삶에도 포기해야 하는 삶과 자리가 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책임진다는 건 포기해야 하는 삶 또한 책임지는 일인 것이다. 쓰기의 세계로 들어서는 일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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