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주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법, 그게 여자의 기술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그림을 감상할 때 비로소, 그 말에 힘이 생깁니다. 위의 그림도 그러합니다. 그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이 감상하면 남자 두 사람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작품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 미안하여 그림에 다가갔다고 합시다. 조금 놀랄 수 있습니다. 커튼이나 양탄자의 문양, 인물의 수염묘사나 의상 등을 보면서 '와~ 정말 잘 그렸다!'는 탄식을 지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눈썰미가 좋은 분이라면 그림의 하단 가운데 그려진 것이 뭔가 의심스러워 옆에서도 바라보고 밑에서도 바라볼 지 모릅니다. 그래도 잘 모르겠어 다른 곳을 살펴봅니다. 그러다 왼편 맨 위의 커튼 뒤로 예수상이 보인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궁금증이 생깁니다. 좀더 살펴보니 악기의 줄도 끊어져 있습니다.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이 그림은 한스 홀바인의 대표작 <대사들>로, 그는 독일태생이지만 죽기 전 10여년을 영국에 거주하였고, 영국에 거주할 당시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도 활동한 이력을 가진 추상화가의 대가입니다. 1533년의 작품으로 아래쪽중앙의 정확히 알 수 없는 그림이 보는 시선에 따라 해골로 보인다고 하여 더욱 유명해진 그림입니다. 현재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장중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해골을 정확하게 감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춰보면 보인다는 말도 있고, 지나가다가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려서 쳐다보면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큐레이터도 있다지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컴퓨터 기술이 좋아져서 3D로 회전시키면 아래와 같이 정확하게 보이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 외에도 수많은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까 관람객이 발견했듯이, 그림을 확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 상단에 살짠 열린 커튼 뒤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모습의 예수를 그렸습니다.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리고 줄은 왜 끊어졌을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홀바인은 궁정화가였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 그림이 당시의 왕과 관련된 그림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영국의 왕은 헨리 8세였습니다. 헨리8세는 서양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중심에 서 있는 왕입니다.
헨리 8세는 튜더 왕조의 두번째 왕으로 그의 아들 에드워드는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합니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는 헨리8세 일가를 배경으로 할 뿐 그 내용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은 아닙니다. 사실 아들보다는 딸이 훨씬 유명합니다. 바로 그의 딸이 무적함대로 대영제국의 기초를 만든 엘리자베스 여왕 1세입니다.
헨리8세의 가족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이자 아내는 누구일까요?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그 유명한 <천일의 앤> 영화의 주인공 '앤 불린'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헨리 8세의 삶은 현실에서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드라마틱합니다. 그와 관련된 영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겠죠. 아버지 헨리 7세의 장남이던 왕세자가 일찍 사망하게 되자 둘째 헨리 8세는 왕위를 물려 받게 됩니다. 하지만 스페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형의 아내였던 카타리나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헨리 8세가 원한 결혼이 아니라 정략적인 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어찌 형의 아내와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에는 결혼을 해도 남편과 성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면 기존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보는 관례가 있었는데, 카타리나 왕비는 남편이 죽자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을 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카타리나 왕비를 제외하고는.
결국 헨리 8세는 카타리나 왕비와 결혼을 하였지만 애초에 정략결혼이기에 정을 주지 않습니다. 결국 왕은 왕비의 시녀인 '앤 불린'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아마도 헨리 8세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녀와의 사랑이 앞으로 영국역사를 어떻게 바꿀지. 사랑에 눈이 먼 헨리 8세는 카타리나 왕비와의 이혼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왕비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로마 제국 카를 5세의 숙모였습니다. 당시 이혼은 교황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던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계속 로마 카톨릭과 결별을 시도하자 프랑스에서 왕을 설득하기 위해 대사들을 보냅니다. 그들이 그림 속의 남자입니다. 중요한 일에는 기념사진 찍듯이 당시에는 그림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그림도 프랑스에서 온 대사가 자신들의 방문을 기념하고 싶어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그런 역사적 배경 하에서 당시 궁정화가인 한스 홀바인이 그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선물로 줄 그림에 왜 예수의 처형장면을 몰래 그려넣고, 알아보기 어려운 형상의 해골을 그렸을까요? 그것도 지금처럼 예술가가 대접을 받지 못하던 시대에 감히 궁정화가가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시대적 상황과 홀바인이 궁정화가인 점을 고려하면, 헨리 8세의 명령으로 그린 것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그림에서 보이듯 프랑스 대사들은 온갖 화려한 것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고 자신들의 기술을 한껏 자랑하듯 준비해 온 것입니다. 헨리 8세는 은근한 압력이라 느끼지 않았을까요? 가만히 당할 왕이 아니죠. 헨리 8세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지 않았을까요? '사랑 앞에 그런 건 모두 허망하다! 나는 이미 카톨릭과는 결별을 결심했다!' 그런 의미로 해골을 그리고, 악기의 줄도 끊고 예수가 처형당한 모습을 그려 넣은건 아닐까요?
2008년에 제작된 영화인데 지금 영화계에서 내노라 하는 스타들이 주조연으로 나옵니다. 그들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난 영화입니다. 나탈리 포트만, 스칼렛 요한슨, 에릭바나는 주연이지만, 짐 스터게스, 에디 레드메인, 베네딕트 컴버배치, 앤드류 가필드가 조연으로 출연합니다. 영화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각색하여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어려움은 없습니다.
헨리 8세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는 결국 교황과 결별하고 영국교회를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이것이 영국 성공회의 시작입니다. 헨리 8세의 사랑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첫째 여인과는 혼인무효를 선언하며서 이혼하고, 로마카톨릭과 결별을 결심할 정도로 사랑한 둘째 여인 앤 불린은 결국 처형하고, 셋째 여인 제인 시모어는 아이를 낳다 죽었으며, 넷째 여인 안나는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합의이혼을 하였고, 다섯째 여인 캐서린 하워드도 처형합니다. 당시에 헨리 8세에게 청혼을 받으면 무섭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섯번째 왕비 캐서린 파와 결혼했습니다.
남성이던 왕이 여성을 업신여긴 업보일까요? 영국은 그의 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오랜 세월 통치를 받게 됩니다. 이제, 그림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나요? 그림은 아는만큼 보입니다. <천일의 스캔들> 영화 속의 대사 한마디를 남기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영화 '천일의 스캔들' 중 엄마가 앤에게 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