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사람들에게 날 이렇게 소개했다. "제 고양이 아시죠? 얘가 주워줬어요. 얘한테 너무 고마워요. 정말."
우연히 삼색의 완벽히 귀여운 고양이를 줍게 됐고 그 고양이를 H가 입양했다. 길고양이를 구조해 주변에 분양한 일이 더러 있지만, 이게 제3자와의 첫 만남에 소개말이 되리라곤 상상한 적 없었다. 소개를 받을 때면 나는 동물보호단체 운동가라도 된 양, 조금은 머쓱하게 "제가 동물을 좋아서요"했다. 아무튼 H는 자신이 얼마나 고양이를 사랑하는지, 그런 고양일 만나게 해 준 내게 얼마나 고마운지 5년 넘게 이야기해왔다. 코스모스 피는 계절에 만난 그 고양이의 이름은 꼬모.
실제로 H의 삶은 꼬모를 만난 후 꽤 달라졌다.알러지 탓에 기관지가 나빠졌으며 고양이를 싫어하는 남자와는 멀어졌다. 고양이와 떨어지는 게 아쉬워 긴 여행도 가지 않았다. 넘치는 사랑은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켜 꼬모를 위한 세레나데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즈음 H는 밖에서 술을 마시는 대신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불렀는데 당연히 고양이 때문이었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H의 집에서 우린 오랜 시간 함께 안주를 먹고 음악을 들으며 술잔을 나눴다. 고양이와 함께 있어 따뜻했고 우리의 이야기는 밤새도록 계속됐다.
그때 H는 엄마 잃은 이야기를 꺼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그녀를 살뜰히 간호했지만 임종은 지키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녀를 사랑했던 아빠의 모습. 아빠의 근황. 그리고 H가 새 엄마라고 부르는 아빠의 요즘 여자친구까지. 울보에다 다정한 성격의 H는 취기에 눈물을 흘려대다가 별안간 아빠가 보고 싶다며 영상통화를 걸었다. 한두번이 아니었지만술버릇처럼 연결된 그 전화에 언제나 자연스레 나도 인사하고 꼬모도 인사했다.우리는 스마트폰 화면 속 아빠의 요즘 여자친구에게도 인사했다. 이상한 가족애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고양이와 고양이를 주워준 사람, 고양이 주인의 직계존속과 그의 여자친구까지 포함된, 이상한 가족의 탄생이었다.
가족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H 엄마의 시간이 그토록 짧았던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제각각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특히나 고양이의 것은 너무 짧았다. 제 아무리 말술에 골초라도 평균 수명 83세의 한국인인 H가 고양이인 꼬모보다 먼저 갈 일은 없을 거였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H는 가족을 또 잃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울보에다 다정한 성격인 H가 걱정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얘기했다. "고양이는 너무 짧게 살아" "우리 고양이들도 우리보다 먼저 떠날 거야" "그게 자연의 섭리인 거지" "자연은 참 잔인해, 그치?" 계속 말하면 익숙해져서 슬픔도 줄어들 줄 알았다. 제대로 체감해 보지도 않은 주제에, 우주를 터득한 것처럼 나는 가족의 이별을 떠들어댔다.
오래지 않아 내 고양이, 링고가 먼저 떠났다. 열아홉 살.사람으로 치자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였다. 대학까지 보낼 거라 호언장담했는데 수능을 쳐야 될 즈음 갑자기 곡기를 끊었다. 링고 덕분에 대한민국 고양이의 평균 수명이 조금 늘었을 것이다. 때문에 주변에선 '오래 살았다, 잘 간 거다' 했다. 그런데 그게 참 서운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호상이란 말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 것이 왔다는 말은 유효하지 않다고 느꼈다. 이런 게 자연의 섭리라면 우린 애초에 탄생하지 않았어야 할 가족이었다고 후회할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개든 고양이든 데려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노인처럼 등이 굽고 걸음이 느려지는, 나보다 어린 동생을 지켜보는 건 내가 상상한 자연의 섭리가 아니었다.
꼬모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았다. 투병 시간마저 짧아 나도 미처 헤어짐을 준비하지 못 했다.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고 몇 주 뒤 허망하게 가버렸다. (고양이가 숨을 헐떡이면 곧바로 병원을 가야 한다, 남은 시간은 아마 1년 남짓일 거다.)H는 울보답게 많이 울었다. 링고가 다니던 병원에서 꼬모도 숨을 거뒀는데, 그때 H가 내게 걸었던 전화를 받지 못 해 아직도 후회가 된다. 꼬모를 좋아하기론 세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수 있었지만 난 꼬모보다 H가 안쓰러워 눈물이 났다. H는 연신 괜찮다고 했다. 괜찮냐는 물음은, 내가 버릇처럼 말하던 '고양이 요절설'만큼 의미가 없었다. 다정한 성격 탓이겠지. 그때의 나는 괜찮다는 그 말이 거짓인 줄 알았다.
H의 '괜찮다'는 진짜였다는 걸, 머지않아 깨달았다. H는 꼬모와 함께 한 시간이 후회 없다고 했다. 내게도 꼬모를 만나게 해 줘서 여전히 고맙다고 했다. H는 이별이 고통스럽단 이유로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대신 남은 고양이들을 더 사랑하겠다고 했다. 그런 H를 보며 나는 삶과 죽음, 이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복기했다. 링고가 떠났을 때, 나는 모든 걸 후회했다. 링고는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왜 링고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까. 나는 애초에 왜 고양이를 입양해서 이 고통을 받나. 그때 이랬어야 했는데. 앞으론 그러지 않아야지. 후회 투성이었다. 하지만 H는 달랐다. 그저 꼬모가 보고 싶다고 했다.
까뮈를 생각하기도 했고, 사르트르니 니체니 하는 철학가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백수 시절, 백수임을 잊기 위해 철학책에 줄 그어가며 나는 실존적인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때였다. 실존주의라는 게 이렇게 멋있는 거구나. 나는 비록 백수지만 그냥 백수가 아니야. 나는 실존적인 백수야. 하고 자위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활자로 배운 삶에 대한 태도는, 다르게 흘러간 내 가족의 시간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대신 H의 괜찮다. 는 말 앞에서 실존을 경험했다. 후회는 없다. 나는 앞으로 더 사랑하고 더 슬퍼하겠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