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 Dec 07. 2023

요정예찬

달빛요정만루홈런




백수인 시절이 있었다. 


백수가 아니기 위해 아카데미도 다니고 대학원도 다니고 뭐든 하려고 했지만 결국 백수인 시절이 있었다. 기자가 되겠노라 상경한 지방대생은 자취방 장판의 기하학 무늬를 따라 그리며 하루를 보내는 취업 준비생이 되어 있었다. 


실연 당해 남자도 없고, 직장을 못 구해 돈도 없었다. 하지만 내 곁엔 청년백수의 유일한 위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있었다. 낡은 아이리버 MP3P엔 달빛요정의 노래가 가득찼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알게 된 <절룩거리네>를 시작으로 달빛요정은 매일 밤과 낮을 나와 함께 했다. 모두 '소리바다'에서 불법 다운로드 받은 공짜 음악이었다.


'나의 영혼도, 나의 노래도, 나의 모든 게 다 절룩거린다'(1집 <절룩거리네>)

던 뮤지션은 꼭 자신의 노랫말처럼 살았다. 


싸구려 커피를 지껄이던 장기하가 알고보니 서울대 출신이라, 방구석 백수들이 감내해야 했던 배신감 같은 건, 그의 인생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노래하는 대로 살았고, 사는 대로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자기 비관이 처절할 수록 어쩐지 더 희망적으로 들렸다. 그 땐 내가 아직 꿈이 있는 20대여서였을까. 


사실 달빛요정은 언제나 낙관을 노래했다. 그의 유작 에세이집인 <행운아>에선 세상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남들보다 조금 게을러서 가난했고, 자기 방식대로 정의로워서 외로웠지만, 하고 싶은 음악을 해서 행복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책에서 달빛요정은 음악에 대한 소박한 꿈을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이라고 불렀다. 

내게 욕망이란 건, 명품백, 수입차, 고급양주, 이런 거였는데. 자존심을 지키고 꿈을 지키는 것이 그에게는 욕망이었단다. 


역시 달빛요정이다. 달빛요정의 노랫말에 숨은 그 욕망의 서사를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그가 누구보다 빛나는 낙관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루저에게 불행을 팔아 연봉 1000만원을 벌던 달빛요정은 떠났다. 

2010년 겨울, 자취방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지 30시간 만에 발견됐고, 치료 사흘 만에 숨졌다. 


'영원히 난 잊혀질 거야, 아무도 날 몰라봤으면 해'(3.5집 <치킨런>)란 희망사항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노래를 아는 모두가 그를 기억하고 절대 잊지 못 할 거니까.  


그 시절 백수도 이제 꿈을 이뤘지만 여전히 그 노래로 위로 받는다. 

5년 전 불법 다운로드에 속죄하는 뜻으로 앨범 전집도 사고 책도 사고 티셔츠도 샀다. 


미안해요, 요정. 잘가요, 요정.





작가의 이전글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