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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호 아저씨는 나에게

재밌게 살라고 하셨다.

by 윤짱


강남역 오피스텔 921호에는 어떤 아저씨가 계신다.


인류가 농업의 효율성을 위해 고안했을 문물을 바라본다. 달력이 어느덧 11월로 접어들었다. 2022년 한 해도 지나가는데, 올해도 내 밭은 풍작이 아닌 것 같다. 내 밭은 언제 결실을 맺을까? 내년에는 어떻게 파종하지? 지금이라도 다른 종파를 심어볼까? 착잡하게 집구석에 붙어 있다가, 내 운명이 너무 궁금해져서 강남역으로 향했다. 강남역 오피스텔에는 용한 아저씨가 계신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고민을 그 아저씨가 차분하게 들어준 후, 꽤 괜찮은 해답을 도출해낸다는 소문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낭패를 보았다. 아저씨가 해가 지날수록 돈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해질 거라고 했다. 마치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처럼 해갈되지 않는 이치라고 했다. 그러므로, 어차피 내 팔자는 흥미 위주로 돌아간다고, 돈 추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눈앞의 베네핏 쫓다가 인생 폭망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절대 비트코인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지금은 안 보일수도 있지만, 가치주에만 투자하라고 했다.


연애운은 적극적으로 못 물어봤다. 혼자 가기 뻘쭘해서 친구를 데려갔는데, 겸연쩍어서 안 물어보니까 아무 썰도 풀지 않는 무심한 아저씨… 아저씨는 분명 나를 커리어에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저씨가 갑자기 내 지뢰밭을 건드렸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어?

이건 솔직히 터놓고 말했다. 종국에는 아버지를 납작하게 만들지 말고, 부디 3D로 구현시켜보라고 조언하셨다. 안 그러면 누구를 만나도 화만 날 거라고 했다.




원래 사주는 고운 말을 하면서, 기운 북돋아주는 거 아닌가? 어차피 돈 많이 못 버니까, 그냥 하던 대로 재미 추구하라는 응원은 처음 들어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역행하는 것도 아니고, 공수래공수거로 갈 팔자라니, 또, 노처녀 리스크를 안고 있는 팔자라고 했다. 허탈하게 10만 원 지불하고 나왔다. 친구는 옆에서 용하다고, 이렇게 체계적으로 말해주는 곳은 처음 본다고 매우 감탄했다. 생각해보니까 한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내 장래를 걱정해주고 응원해준 아저씨에게 감사하다.


집에 와서 아저씨의 솔루션을 바로 적용했다.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딸은 돈도 못 벌고, 시집도 못 간대~

아저씨가 부모님의 욕망과 나의 욕망을 동일시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나한테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으실지는 모르겠지만, 기대 스위치를 꾹- 눌러서 off 시켰다.


그리고, 월요일 출근길에 아빠를 3D로 구현시켜 보았다. 새벽 여섯 시부터 시야가 흐려졌다. 우리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사실,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매섭던 친할머니만 또렷하게 기억났다. 아빠를 보러 가면 말이나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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