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습작 習作
부고가 들려왔다. k선배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거진 10년은 지나버린 k선배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선배의 말 한마디가 두둥실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친구가 좋았던 게 아니라, 그때의 내가 좋았던 것 같아.
당시, 전 여친과 헤어지고, k선배는 해소되지 않은 이별 후유증을 나에게 토로했다.
그렇게 한동안 이야기 들어주면서 급 가까워졌다가 급 멀어졌다. 그 여름날에 내가 그 선배한테 대차게 고백했다가 시원하게 까였기 때문이다. 위로가 되었던 건, 학기별로 썸 타다가 까인 여자들이 수두룩했다는 후문이었다. 나만 슬픈 게 아니라, 다 같이 슬퍼서 이상하라만치 위로가 되었다.
또, 본인이 헷갈리게 한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하고 뉘우친다. 고 나한테 사과를 했다.
거절에도 예의가 있다면, 참 착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그렇다. 기억은 미화된다. 안 좋은 기억은 사라지고 좋은 기억만 남는다. 당시에 나한테 어장 쳤다고 친구랑 한강공원에 드러누워서 쌍욕과 저주를 퍼붓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즐겁게 나눴던 대화만 기억난다.
당시 그 선배의 나이를 넘어서니까, 이해 못 했던 행동들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모든 걸 아는 것처럼 근사한 말을 일삼던 선배도, 지금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애송이였던 것이다. 빈소는 멀어서 못 갔지만, 먼발치에서 안정적으로 잘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성공, 실패, 사랑, 모멸, 결혼, 이혼, 탄생, 죽음 등 감정이 결부된 사건들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경향이 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감정을 유발하는 경험을 그렇지 않은 경험에 비해 더 잘 기억한다. 일반적으로 감정이 강력할수록 기억은 더 생생하고 세세한 내용까지 정교해진다.
감정과 의외성이 편도체 amygdala라는 뇌 부위를 활성화하고, 자극을 받은 편도체는 해마에 강력한 신호를 보낸다. 단순화하면 이런 식이다. "이봐, 지금 진짜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이거 꼭 기억해야 돼. 단단히 저장해 둬! " 그러면 뇌는 우리의 경험과 연관해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있었고, 언제였고, 그때 기분은 어땠는지 등의 세부적인 맥락을 포착해서 한데 묶는다. 감정과 의외성은 뇌 속을 요란스럽게 행진하는 대규모 취주악대처럼 신경회로를 자극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아차리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는 감정적 요소도 의외성도 없다.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경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기억을 곱씹는 경향이 있다. 감정과 결부된, 의미 있는 이야기를 되돌아보고, 다시 말함으로써 이 기억들을 더 강하게 만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극히 감정적인 어떤 일을 경험한다면 소위 섬광기억[flashbulb memory]이라는 것이 생성될 수도 있다. 섬광기억은 충격적이고 굉장히 의미 있으면서 공포, 분노, 슬픔, 기쁨, 사랑 등의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경험들에 대한 일화 기억이다. 이렇게 완전히 예상 밖이고, 개인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감정이 잔뜩 결부된 경험은 절대 잊지 못할 기억이 되어 몇 년 후에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 인생을 어떤 이야기로 가꿀 것인가? ]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화기억을 하나로 엮으면 내 인생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한 데 모인 기억들은 자서전적 기억 autobiographical memory이라고 한다. 첫 키스, 결승골 넣은 날, 대학 졸업식 날, 결혼식 날, 처음 집을 사서 이사한 날, 파격적인 승진, 자녀의 탄생과 같이 인생의 주요 장면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자서전적 기억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 있는 순간들이 반드시 무지갯빛의 신비한 동화 속 장면들은 아니다. 무엇을 기억하는지는 인생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관에 부합하는 기억들을 저장하는 경향이 있다.
예시 >>
철수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긍정적이다. 철수의 자서전적 기억은 틀림없이 웃음, 감사, 경외로 가득할 것이다. 반면, 미영이는 불평을 입에 달고 산다. 미영이의 인생 서사, 즉 미영이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겨놓은 이야기들을 모으니 한 편의 비극이 되었다. >>> 긍정적인 사람은 생존력이 강하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뭔가 지적인 성과를 냈을 때의 일은 세세히 기억하는 반면 바보 같은 실수를 했을 때의 일은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계속해서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보여주는 일화들에 대해서만 기억을 불러오고 회상하다 보면, 그런 기억들은 더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자신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믿음도 강해진다. >>> 소위 헛 똑똑이라고 부른다.
감정을 자극하는 요소가 없고,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작은 부분들이라서 또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믿음에 부합하지 않아서 기억에서 밀려난 일화들 외에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
일상에서 벗어난다.
스마트폰을 끄고 세상을 본다.
느낀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주파수를 키운다.
되뇐다.
일기를 쓴다.
SNS를 활용한다. 시간 순으로 배열된다.
우리는 평소에 기억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한순간도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기억'은 어떤 일이나 지식 등을 머릿속에 넣어 보존하거나 되살려 생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컴퓨터에 입력하고 출력하는 것과 비슷하다. 입력은 충실하게, 출력은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기억 능력이 온전하다고 할 수 있다. 기억은 컴퓨터의 메모리와 달리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기도 하고, 변형(또는 왜곡)되기도 하며 잊히기도 한다.
'추억'역시 어떤 일을 되살려 생각하는 것이는 점에서 기억과 비슷하다. 하지만 기억이 어떤 일을 머릿속에 넣어 보존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는 반면, 추억은 그럴 수 없다.
'추억'에 잠긴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일이고 그때의 감성에 촉촉이 젖는 일이다. 흔히 추억은 그리움의 정서를 동반한다. 추억에는 그 시절로 돌아가 그때 그 기분을 다시 느껴 보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
'기억'은 다른 말과 결합하여 복합어나 용어를 풍부하게 생산해 내지만 추억은 그런 생산성이 빈약하다. 또, 기억은 나거나 가물가물할 수 있지만 추억은 그럴 수 없으며, 추억은 깃들 수 있지만 기억은 깃들 수 없고, 추억에 젖을 수 있지만 기억에 젖을 수는 없다.
우리말 어감사전 < '기억'과 "추억"편 > 안 상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