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by 아메리카노

유난히 못 견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시간 약속에 늦는 것이다. 내가 늦는 것은 물론 약속한 상대방이 늦는 것은 더더욱 싫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 중 하나는, 지각이 습관이었는데 한 번은 삼십분 넘게 기다렸고, 너무 화가 나 그 친구가 오자마자 나는 집으로 가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구는 직장 생활 중에는 지각을 별로 안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이제는 융통성이 생겨서 친구들과 만남에서 오분 십분 정도는 그려려니 한다. 그리고 자주 늦는 친구를 만날 때면 최대한 나도 늦장을 부린다. 보통 약속을 정시에 잡는데 그런 친구들과 만나는 날이면 어중간하게 한 시에서 한 시 반 사이, 라고 애매하게 정한다.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흐른다. 공평하게 하루 스물 네시간씩 주어진다. 일 분 일초로 허투루 쓰지 않고 살아가자는 건 아니다. 그냥 적어도 상대의 시간을 깎아 먹지는 말자는 거다.




최근 새로 근무하게 된 학원의 학생들은 단 한번도 제 시간에 나타난 적이 없다. 그 아이들은 오 분 십 분 늦는 것도 아니다. 기본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씩 늦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아 한다. 막말로 그들은 돈으로 내 시간을 산 셈이다. 세 시간짜리 수업을 샀고 본인들이 앞 시간을 그냥 날려 버린거다. 철저하게 따지고 보면 이런 논리지만, 학습에선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늦었고 그 시간만큼 나는 보충으로 채워야 한다. 내가 아이들을 삼십분 전부터 기다렸다면, 나의 스물 네 시간 중 총 한 시간 삼십분을 날린 셈이다. 그런데 그냥 날린 것이 아니라, 뒤에 남은 내 시간들 중 한 시간을 더 사용해야 하는거고, 결국 그들이 나의 하루 중 두 시간 삼십 분을 공으로 가져가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공으로 그들에게 내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물론 나를 고용한 원장의 입장에선 조금 언짢은 일이고, 내게 시간을 더 빼라고 눈치를 주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 그냥 가버렸다. 스케줄이 너무나도 빡빡한 아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초조하고 화가 났다. 다음에도 그들이 늦을 것이고 나는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안다면 그 시간에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나는 너무 바쁘다. 할 일이 많아, 짬이 난다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 몹시 불쾌하다.




사람들은 돈을 빼앗길 땐 누구보다 예민하게 군다. 손해나는 일이 비단 돈에만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라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꼭 적용해야 할 것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이 똑같이 흐르고 있는 한, 거기다 상대의 시간과 내 시간이 엮이는 순간부터는, 시간은 온전히 내것만이 아니다. 내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만큼 나는 상대방의 시간도 함께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간이 합쳐졌으니 오히려 더 아끼고 귀한 것이 아닐까. 아이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가르치고 싶은 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을이니 앞으로도 내 시간을 낭비해야 할 지도 모른다. 적어도 부질없이 기다리게만은 하지 않아 주길, 인생은 짧고 하루는 더 짧으니, 내 마음대로 상대의 시간을 마구 쓰는 일만큼은 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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