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는 복선이 없다

by 아메리카노

수업을 하다 보면 수십번도 더 읽었던 작품에 새삼 감동 받는 경우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다. 교과 과정이 바뀌어도 매번 빠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읽을 때마다 정말 버릴 문장이 하나도 없다는 걸 느낀다. 제목과 첫 문장의 연결 역시, 소설 창작 때 배우던 공식 그대로다. 학교 시험에 나오는 것은 늘 정해져있다. 제목의 표현 방식, 비라는 배경이 소설에서 끼치는 영향, 일제 강점기의 비참한 하층민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서술 방식, 그리고 설렁탕이다. 언젠가부터 김첨지의 슬픈 대사가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쓰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왜 먹질 못하니', 운수 좋은 날은 조금도 웃음이 나지 않는 작품인데 말이다. 운수 좋은 날은 초반부터 끝까지 아내가 죽을 것이란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 준다. 그것은 소설에서 꼭 필요한 개연성이고 복선이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는 암시 따위는 없다.




오늘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망한 소식을 들었다. 이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이웃집의 일이다. 우리집이 11층이었던 시절, 그 가족은 1층에 살았고 첫째 딸이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다. 언니와 나는 나이를 먹을 수록 소원해졌지만, 엄마는 1층 아주머니와 지금도 왕래했다. 언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들까지 있었다. 여전히 동네가 비슷해 가끔 얼굴을 보기도 했지만 인사를 나누진 않았다. 그런데 그 언니가 한 달 전에 하늘나라에 갔다고, 엄마가 내게 말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말도 안되는 소식이었다. 젊은 나이에 왜? 이게 바로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지는 잎,을 보는 기분인 건가? 언니는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단다. 열이 심하게 올라 얼굴에 열꽃이 피었고, 속이 메스껍다고 했다. 동네 가정의학과에선 요실금이 조금 심하다고 했다. 약을 먹어도 호전 되지 않아 대형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지만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렇게 큰 병원을 세 번이나 갔지만 특별한 검사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삼일 만에 세상을 떴다. 여기까지가 엄마가 듣고 온 이야기였다. 엄마는 그 집에서 한 시간을 같이 울다가 왔다고 했다. 하루 아침에 엄마를 잃은 아이들은, 찐만두를 한 봉지씩 먹어치웠다. 아이들이 볼까 봐 싱크대에서 할머니는 흐느꼈다. 듣기만 한 장면들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왜 나는 그 언니를 그동안 까칠하게만 생각했을까, 새삼 미안했다. 갑자기 딸을 잃은 아주머니를 길에서 만난다면 어떤 얼굴로 인사를 해야 할지 벌써부터 마음이 먹먹하다.




비가 내리는 날도 아니었고 예상하지 못한 운수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떠 출근을 하고 정해진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고, 사람들의 일상은 대부분 비슷하다. 특별히 기쁠 일도 특별히 슬플 일도 없는 것에 붙이는 단어가 일상이다. 그런 일상에서 불행은 너무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마음의 준비라도 할 기회를 준다면 조금 나을까, 너무도 황망한 소식에 악몽 속에 있는 기분이다. 남의 불행을 이야기 하며 우린 건강하게 살자라고 다짐하기도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