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by 아메리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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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3장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먼저 작가의 말을 읽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 하다. 방화 사건을 다루는 소설이 어째서 성경과 연관이 있는지, 물론 전혀 모른다고 해도 작품을 읽어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목양면은 광역시와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하루에 사람을 만나는 횟수보다 닭을 만나는 횟수가 더 많은 지역이다. 그런 곳에 있는 한 교회에 불이 난다. 제목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엄연한 '방화' 사건이다. 소설은 그 사건의 범인을 밝히기 위한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다. 10명의 면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전부 나이가 다르고 직업이 다르다. (열 명의 인물의 목소리를 각각 다르게 서술한 문장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건을 보는 시선은 단 두 가지다. '방화'와 우연한 '사고', 방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목하는 용의자는 고인이 된 '최요한'과 마지막에 그와 다투었다는 '민석'이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최요한'은 교회의 담당 목사로 '최근직'의 아들이다. 최근직은 작가가 쓰고 싶었던 성경 속 '욥'이라는 인물에 대응한다. 성경 속 욥은 자식들을 잃는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발바닥에 악창이 나자 신을 저주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만 집중한 아버지였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그보다 떳떳하다고 말할 아버지는 없다, 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 서사다.




애들은요, 아빠가 없어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구요, 문제가 생긴 다음부터 아빠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구요. 그게 어떤 차이인지 잘 모르시죠? 하여간 좆같은 세상이라는 뜻이에요.



최요한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최근직 장로, 두 명의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산 그는 온전히 자신의 이름으로 살지 못한다. 목사, 혹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정의된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아들의 삶에서 어떤 존재여야만 하는가? 또 아들은 아버지의 삶에서 어떤 존재여야 할까? 최근직에게 최요한은 영업 노하우 같은 존재다. 교회를 일으켜 세우고 부를 축적하게 만드는, 그 누구도 최근직을 방화범으로 지목하지 않게 만드는, 마을의 절대 권력이자 신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전부 아들 최요한 덕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목소리는 전혀 듣지 못하는 비정한 아버지다.


죄가 없이 고통받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겠지만, 고통이 죄가 없는 사람에게 무작정 찾아오는 염치없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재정의, 그리고 서로가 어떤 존재로 있어줘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추리물인 척하는, 가족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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