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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그리운 할머니

by 유긍정


나에겐 요즘 같은 장마철이면 이따금 생각나는 추억이 하나 있다. 내가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 됐을 때의 이야기다.

어릴 적 일하는 엄마 대신 나를 돌 봐주시던 할머니와의 추억중 하나인데, 이 날의 기억이 꽤나 강렬하게 남아있다.



비가 미친 듯이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긍정아~ 노올자~”


저녁 무렵 할머니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언니가 새로 산 커다란 해적선 레고가 있는데 같이 하러 자기 집에 가자며 나를 불러 냈다. 철딱 서니 없는 꼬마인 나는 메모 한 장 남겨 놓지 않고 신이 나서는 언니를 따라나섰다.

혼자서 밖에 나가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혼자 밖에 나가 놀다 집에 들어오고는 했던 시절이라서, 할머니가 집에 돌아오셨을 때 내가 없어도 어디 또 잠깐 놀러 나갔나 보다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밥 먹을 때가 됐는데도 오지 않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을 테고, 그때부터 할머니는 나를 찾기 시작하셨을 것이다.

이때만 해도 휴대폰이라는 게 없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전화번호를 적어 놓은 수첩이 하나씩 있었다. 할머니는 그 수첩에 적혀 있는 내 동네 친구들 집에 하나하나 전화를 걸어 보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언니와는 나이 차이가 조금 있었고, 할머니는 또래 친구들 집에만 전화를 걸어 본 모양이다. 그 누구의 집에도 손녀딸은 없었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빗속을 뚫고 나를 찾아 헤매셨을 것이다. 할머니가 나를 찾아다니는 사이, 비는 더 많이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고, 동네에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집이란 집은 다 가보신 것 같았다.


할머니가 나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동안, 나는 언니와 해적선 레고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이 언니네도 맞벌이 집이라 할머니가 돌봐주고 계시는 집이었는데, 나는 집에 허락받고 왔다고 하고는 저녁도 얻어먹고, 밤늦게까지 집에도 안 가고 태평하게 장인의 손길로 레고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철없는 꼬맹이다. 시간은 째깍째깍 밤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띵동


언니가 문을 열자, 양쪽 어깨가 다 젖은 나의 할머니가 서 계셨다. 그때만 해도 커 보이던 할머닌데, 지금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왜 이렇게 작게 느껴지나 모르겠다. 그런 할머니는 나를 보고 꾸짖으시지도 않았다.


“너무 늦었어. 빨리 집에 가자.”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대충 사태 파악이 된 나는, 급히 인사를 하고 할머니를 따라 나왔다. 밖은 이미 캄캄했다. 엄청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천불 나는 할머니의 마음을 대변하듯 천둥과 번개가 우르르 쾅쾅. 하늘이 할머니를 대신해서 나를 야단치는 것 같았다.

1층에서 할머니는 커다란 검은색 우산을 펼치시고는 등을 들이밀며 쭈그려 앉으셨다.


“업혀”


멀지 않은 거리지만 할머니는 나를 업고 집까지 뛰셨다. 뛰면 1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지만, 혼날까 무서워서였을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그 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로 모션으로 느껴졌다. 집에 와서도 할머니는 나를 혼내기는커녕, 손녀딸의 끼니를 걱정하셨고 따뜻한 물로 다정히 씻겨주셨다.


이 날의 일은 정말 잊히지가 않는다. 아직 10살도 안된 꼬마지만, 할머니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내가 없어져서 많이 걱정하셨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다.

나중에 엄마에게 혼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에게는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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