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해지고 있어요, 저에게
이젠 정말 우울증과 멀어지는 중
나는 브라스 소리를 좋아한다. 일전에 쓴 적도 있지만, 그래서 샘 스미스의 <Love goes>를 한참 동안 즐겨 들었다. 소리로부터 전해져 오는 기운이 있다. 커다랗지만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하프의 소리,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플룻 소리, 어릴 때부터 음악이란 음악은 부지런히 들어왔다.
7살 무렵, 유치원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집을 나서는 엄마와 오빠를 마주쳤다. 집 앞의 음악학원에 등록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길로 나도 엄마와 오빠를 따라 집 앞의 음악학원에 등록했다. 여러 칸으로 나누어진 방으로 들어가면,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었고 그곳에서 하얗고 까만 이빨 같은 것을 눌러가며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를 연주한다기보단 피아노 그 자체를 배웠다.
피아노 수업은 이런 식이었다. 가령 10번을 연습하고 검사를 받아야 한다면, 종이에 그려진 10개의 과일을 한 번 연주할 때마다 한 개씩 색칠해야 했다. 줄마다 다른 과일이 그려져 있어서 세로로 색칠도 해보고, 온갖 방법으로 과일을 채웠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재밌기도 했지만, 사실 같은 곡을 반복해서 배우는 것이 지겨울 때가 더 많았다. 특히 콩쿠르를 준비할 때면 더욱 피로가 올라갔다.
그런데 빠지지 않고 음악학원을 다닌 걸 보면, 나는 음악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콩쿠르를 나가게 되었는데, 무리한 탓인지 허약한 탓인지 감기에 걸린 채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급기야 나는 피아노를 치다가 졸았는데, 감상하듯 눈을 감고 치다가 눈을 떠보니 고개가 건반 위에 있었다. 첫 번째 콩쿠르에서의 수상 이후, 잘해보고 싶은 욕심이 만들어낸 웃긴 에피소드였다.
어쨌든, 음악을 좋아해서 그런지 곡을 들을 때면 악기 별로 쪼개서 듣는다던가, 선율을 따라서 듣는다던가, 한 곡 안에서도 전개되는 양상을 나눠본다. 이런 유별난 음악감상 덕인지 비교적 소리에는 예민한 편이다. 바로 옆에서 고구마가 불에 타도 모르는 후각을 가졌지만. 소리, 어떤 소리에 의해 생각이 좌우되곤 한다.
작년과 다른 점이라면, 올해의 나는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 목표는 단연 "더 행복하기"로 정했다. 그래서 더 많은 거장들의 음악을 듣고 있다. 어떤 음악이든 좋지만, 거장이라고 불리는 창작자의 음악을 듣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목표의식이 명확하여 그 길을 따라 걸은지 꽤 시간이 지난 사람들이며, 여전히 그 목표를 이루면서 살고 있는 한 세계의 창조자다. 그들의 깊은 생각과 고뇌의 시간들을 소리로 듣는 것이 좋다. 그럼 나는 어떤 첼로 소리에 내 마음을 퉁퉁 튕기는 걸로 힘차게 일어나기도 하고, 고조되는 피아노 소리에 더 씩씩하게 걸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내 마음에 남은 음악은 얼기설기 놓여 곳곳에 틈이 있다.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의 말, 새의 말, 구름의 말, 온갖 것들이 들려온다. 그것들을 전해 듣고는 화답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운 요즘, 나는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뱉는 것, 생각하는 것까지,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실은 '말소리'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나를 그렇게 사지로 몰고 죽어라고 내칠 땐 모든 것이 슬프고 외로웠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내가 되자 나는 나의 모든 것이 좋다. 잘하진 못해도 작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린다던가, 많은 단어를 아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던가, 잘하진 못하지만 외국어를 한 두 마디씩 뱉어본다던가. 나의 세상이 악장마다 새로운 변주로 나아간다.
약기운을 이겨내고 오전을 되찾기 위해 나는 어떤 소리에 또 한 번 기대어본다. 허점투성이라 해야 할 것들이 천지에 놓인 얄팍한 내 하루가 좋다. 더 일찍 일어나서 고요한 시간에 듣는 바닷가 사람들의 소리, 오늘도 잘 일어났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나의 말, 내게 뱉는 나의 마음이 따뜻하다. 나의 말이 다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