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일어나는 일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달면 좋은 일, 쓰면 나쁜 일로 둔갑한다. 그런데 머리가 새하얗게 센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말, "그땐 몰랐지."
얼마 전, 독서모임을 하다 취업준비가 한창인 멤버 하나가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에 대한 고충을 토로했다. 자기소개를 해보라 함은 나의 연대기가 나오기 마련이고,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면 짧게는 10년 정도의 미래에 대해 이야길 하게 된다. 비록 해당 회사에서 궁금한 것은 나의 개인적인 미래 구상이 아니겠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 보게 된다. 10년 안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부단히 오랫동안 고민했다. 코앞에 들이닥친 내일도 나는 아직 살아보지 못했는데, 10년 뒤의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시험을 관두고 도피처럼 취업준비를 한 탓인지 내게 미래는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과거는 실패한 것이며, 오늘은 깊은 실패와 아득한 무의미 속의 교두보였다. 매일매일이 인스턴트였다. 닥치는 대로 살았다.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해낸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일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그럴 힘도 의욕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일은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나쁜 일은 유독 진득하게 느껴졌다. 고대하던 회사의 입사 시험에서 떨어지고,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뒷목이 좀 뻐근하고 기운이 없기에 병원으로 갈 채비를 했다. 목을 가눌 수 없어서 머리를 버스 창문에 대고 있으니 시원했다. 시험에서 떨어진 충격이 컸다. 머리에 창문의 냉기가 전해지자 탈락의 아픔, 아니 조금 더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사는 삶에 대해 정신을 차리고 고민했다.
병원에 도착하고, 몸에 기운이 없다고 말하자 열부터 쟀다. 의사 선생님께선 열이 39.7도라며 어떻게 병원까지 혼자 올 수 있었는지 물어보셨다. 그런 건 내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시험에 떨어진 일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픈 동안은 환자라는 타이틀을 달겠지만, 일주일 뒤면 다시 무제가 될 나를 떠올리면 골치가 아팠다. 수액을 맞고 타미플루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내게는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이름 없는 그곳, 가능성만 가지고 있는 준비생의 자리였다.
타미플루의 부작용으로 환각이 있다는데, 혹시나 내게도 그런 부작용이 있을까 봐 내심 기대했었다. 환각은커녕 악몽에 잠을 설쳤다. 호전도 더디고, 나을 의지도 없는 걸 인플루엔자도 알았던 게 분명했다. 독감에 이어 기관지염이 걸렸다. 기침을 하면 본 적 없는 연약한 갈비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심장도 못 지킬 테고, 폐도 못 지키면 갈비뼈는 왜 있는 거야? 자주 놀라고 자주 숨을 가쁘게 쉬는데, 대체 내 장기는 뭘 하는 거야? 별게 다 불편했다. 그때 나는 나의 삶에서 고통 밖에 찾을 수 없어서, 삶의 의미를 애써 구하진 않았지만 몸으로 알고 있었다. 고통, 내 삶은 살아있는 동안 생생하게 느껴야 하는 지옥이었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름 붙이는 것은 더 어려웠다. 내가 느끼는 건 오늘의 감정이고,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한 평가는 감정에서 파생되었다. 내 기분이 나쁘면 오늘은 힘든 날, 힘든 일이 있었으면 기분이 나쁜 날. 삶이 이렇게 단조로울 수 있던가. 단편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사소하게 영향을 남긴 모든 것들을 끌어다가 그걸 삶의 의미라고 하기엔 삶이 실은 엄청나게 큰 건 아닐까. 삶을 더 제대로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
그걸 그렇게 찾느라 헤맸다. 시험에 낙방해도 그러려니, 회사에 붙어도 그러려니, 그래서인지 회사를 관두고 나올 때도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몇 번의 머리칼을 더 기르고 또 자르자 분명히 보였던 지옥은 더 이상 없었다. 머리가 셀만큼의 시간은 아니었지만, 수 만 가지 앞날의 수를 세어보려던 한낱 인간의 잔머리가 사라졌다. 지옥은 내 것이었다. 누구도 내게 지옥 속을 살라하지 않았지만, 내 의지로 열렬히 만들어낸 첫 창조물이 되고만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자조하긴커녕 세상과 같이 살지 않는다며 타박하던 나, 그깟 직업보다 깊은 밤 혼자 아파하던 나를 외면하던 나, 이 모든 걸 차치해 둔 내게만 박한 내가 완벽한 지옥을 만들었다. 그리곤 삶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나는 내가 만든 그것을 무너뜨리고 눈앞에 있는 걸로 이 삶을 판단하는 바보 같은 짓을 당장 내려놔야 했다.
지금의 내게 삶의 의미가 뭐냐 하면 나는 그걸 모르기에 살고 있다고 허허실실 웃는다. 삶은 허탈한 순간이 있어도 허무하지는 않다. 삶의 의미는 아직 살아보지 않은 미래에 대고 명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모아 미래의 내가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삶의 의미에 관하여 더는 고민하지 않고 있다. 아직 내게 기미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살아낼만 하다. 기대하며 살아볼만 하다. 살아보며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번 생을 살게 된 이유, 그 끝에 가면 알게 될 것이기에 열과 성을 다해 지금을 살아가는 수밖에.
삶의 의미를 고민하지 말아요. 알면, 또 모르면 무얼 할까요. 그런 건 말장난에 불과할 텐데. 또 다른 오늘이 오면 우리가 그렇게도 궁금해하던 삶의 의미는 또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맹인모상(盲人摸象)이 되겠죠.
"순간순간 죽음이 죽고 다시 태어나고 있다. 삶이 그러하듯이.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우리 인생길의 한 중앙, 올바른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무서움으로 적셨던, 골짜기가 끝나는 어느 언덕 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는 위를 바라보았고, 이미 별의 빛줄기에 휘감긴 산 꼭대기가 보였다. 사람들이 자기 길을 올바로 걷도록 이끄는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