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3 댓글 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노각에게 말을 걸었다

by 순두비 Jan 16. 2025


엄마랑 집 근처 홈플러스에 다녀왔다. 엄만 필요한 것을 골랐고, 나는 그 옆에서 카트를 끌며 따라 걸었다. 엄마가 물건을 고르는 동안, 나는 매장을 둘러보며 눈에 띄는 것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아주 귀여운 것을 발견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그것의 이름은 노각이다. 쳐다보고 있으니 엄마가 '늙은 오이'라고 알려주셨다. 노각 주변에는 익숙한 초록 오이들이 있었다. 가시 돋친 오이, 가시 없는 오이, 미니 오이도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노각만 유독 과일처럼 포장재에 싸여있었다. 크고 두꺼운데다 유일하게 포장재로 싸여있음에도 잔흠집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노각을 처음 보았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늦게 수확했기 때문에 늙은 오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 오이는 보통 30일 안에 수확해야 하지만, 노각은 30일을 더 두고 난 후에 수확한다. 그래서 '늙은 오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나는 오이의 생명은 썩 길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 30일을 늦게 수확하였는데 '늙은 상태'란다. 풋오이보다 단맛이 난다고 한다. 겉은 더 딱딱하고 맛이 다른데도 오이라 불리는 걸 보니 태생은 어디 가지 않나보다.


노각에게서도 한 생애를 보는 것이 어딘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사소한 것들 구석에서 의미를 찾으며 살아간다. 이런 별스러운 행동 덕분에 어딜 가든 무엇을 보든 힘을 얻는다.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슬프고 고요해지지만, 이렇게 말을 걸어놓은 이런 것들이 내 곁에 많을 때, 나는 그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젖은 눈을 말릴 수 있다. 


사람에게는 때가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대개 사람은 비슷한 양상의 삶을 산다. 그렇다 보니 어떤 나이에 해야 하는 일들이 있어 평범한 삶을 위한 요건으로 거쳐야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누군 결혼을 하고 또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유학을 가고 시험을 치는 내 또래 친구들이 하고 있는 것들을 볼 때면 나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인가 생각이 든다.


패인 곳이 있는 것일 뿐 상처 나지 않은 살도 많은데, 한 군데만 파여도 사람들은 흠집 난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몇 가지 결정이 남들과는 조금 다른 나로 보이도록 만든 것처럼, 때때로는 부분이 전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더 시간이 흐르면 나도 어떤 틈바구니에 있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기준이란 오지 않은 날보다 날카롭다. 우리는 쉽게 타인을 규정하고, 그 잣대는 현재에 엄격하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 거치는 수많은 관문들. 확신이 있어야 지나쳐 올 수 있다. 결혼을 결심할 땐 이 사랑이 맞다, 아이를 낳을 땐 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같은 것들. 나는 일말의 확신도 없어 잰 걸음으로 오래도록 거닌다. 그래서 아직 거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아직 형체도 알아보지 못한 나의 생을 어렴풋이 만져볼 때마다 매끈하지 않은 단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싱거운 시간들에 단맛이 배어들면, 흠집도 훈장이 될 수 있을까. 아주 나이가 든 후에라도 나의 쓸모를 발견한 것에 만족하면 내게도 단맛이 올라올까. 


그때쯤이면 갓 생겨나 성난 흠집도 나와 동행하여 잔잔한 그물 무늬로 남아있겠지. 그럭저럭 걸릴 것 없이 살고 있으면 좋겠다. 천 가지 맛 중에 유독 자주 맛본 쓴맛과 단맛. 그 기억들이 나의 인생을 그저 재미없는 것으로 단정짓지 않길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나는 귤을 그만 먹고 싶은데!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