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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May 23. 2021

페루에 또다시 가게 된다 해도

어떤 무용담

나의 친구 Y는 내가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며칠을 자고 올 때마다 지천에 널린 풀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향기가 좋은 것을 골라 잎을 따주었다.


많고 많은 초록잎을 나에게 가장 잘 소개해줄 수 있는 친구였다. 코끝에 이파리를 갖다 대 주며 좋은 향기가 난다고 능숙한 손으로 이파리를 뚝뚝 끊었다. 밭으로 가지 않으면 아침 이른 시간 따온 풀들을 물에 씻어 바구니에 담아놓고는 내가 마실 에이드 위에 올려주었다. 나는 에이드도 잘 몰랐고, 식물도  몰랐다. 그렇지만 친구가 텃밭에서 정성스레 길러 아침으로 먹는다는 온갖 채소를 따라먹는 것이 그저 좋았다.


친구 Y가 머무는 곳에 가면 나른하게 고여있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만나 그간 읽었던 책에 대한 이야길 하고, 친구가 한 달치 용돈을 다 쏟아부어 사들인 책을 구경하며 맥주를 마신다. 고요한 밤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 노래를 잔잔하게 틀어놓고 느지막하게 씻고 누워 또 이야길 나눈다. 머리맡에 둔 램프를 켠다. 그러면 좀 전까지 빛을 내던 전등의 빛은 사라지고, 전등의 실루엣이 벽지에 번진 고요한 그림자로 남아 있는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 말이다. 오랜만에 만날 때마다 새로운 책과 새롭게 배운 지식들을 이야기하며 내가 넘볼 수 있는 넓은 세상을 알려준다.


Y는 내 세상을 넓혀주는 가장 용기 있는 친구이다. 사막을 다녀올 때면 뜨거운 낮 햇살을 견뎌 모래 위를 적시는 밤하늘의 별을 기어코 보고서 내게 전해준다. 낯설지만 날씨가 더운 나라에 가서도 정적인 내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가장 화려하고 따듯한 색의 실로 짜인 가방을 가져다주었다. 용기 없는 나는 색깔 예쁜 가방을 귀하게 모셔두고는, 언젠가 너를 따라 꼭 페루에도 가볼 것이라 다짐하는 것으로 최대한의 용기를 내본다.




이런 친구 Y는 나를 잘 모를 때부터도 내게 모든 것을 열어두었다. 내가 처음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를 참가하게 되었을 때, 지리를 잘 몰라 서울에 혼자 가는 것이 무서웠다. 그런데 인천에 살고 있던 Y는 선뜻 나를 데리러 서울역에 나오겠다고 했다. 리의 첫 만남이었다. 통성명하지 않아도 멀리서 배시시 웃으며 걸어오는 걸음걸이에 알 수 있었다. 서울역사를 걸어 나가면서부터 나는 모든 것에 미숙했다. 부산에서는 잘만 지나다니던 개찰구에서도 반대 손으로 카드를 찍어 지나가지 못했다. 결국 엄청난 벽 앞에서 당황하던 나는 개찰구를 기어서 나오고, 친구는 나를 바라보며 기다려주었다.


고 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빛을 발하진 못했어도 그 덕에 대회에 잘 참가했다. 그런 대회에 참가를 해본 것만으로도 조용한 섬에 있는 나의 고등학교로 돌아왔을 때, 1년 하고도 수개월을 더 흥분해있었다. 세상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 설렜다. 내가 모의고사를 잘 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었다. 우물 밖을 본 개구리가 우물 밖을 동경하느냐는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내가 살던 우물 밖엔 Y가 있었다.


더 넓은 세상, Y가 있는 세상에 가고 싶었다. 공부를 하기 싫을 때면 그 세상을 떠올렸다. 자유롭게 서류를 낼 수 있었던 당시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나는 친구에게 받은 편지를 잔뜩 복사해서 제출했다. 교수님들은 첫마디에 내가 왜 편지를 냈는지 너무 궁금해서 만나보고 싶었다 하셨다. 나이 든 노교수님들 앞에서 나는 친구 Y와 또 다른 친구들이 편지에 써놓았듯 아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Y가 처음 본 내게 보여준 믿음이 내게서 더 크게 자란 덕에 배포를 부려보았다. 것은 심한 내가 자랑할 수 있는 첫 무용담이다.



Y가 자꾸 약해져서는 내게 잘할 수 있을지를 물어온다. 대개 수험생들이 다 그렇겠지만, 어떤 날은 힘을 냈다가도 다음 날은 또 힘이 빠지는지 불안해한다. 그러다가도 이 길이 아니라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곤 하지만, 또다시 제자리를 맴도는 질문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함께 지나온 시간들을 보면 알게 된다. Y는 머무는 자리에서도 벽을 허무는 사람이고, 지나간 자리엔 무언가를 심어 두고 가는 사람이라 오늘의 서성임은 땅을 다지는 것일 뿐 Y의 인생에 장해물이 아니다.


Y는 늘 내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말해준다. 내가 잘하는 것, 못하는 것,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지게 될 것, 나의 어제와 오늘과 미래, 모든 것을 의미 있게 봐주는 덕에 나의 불확실함에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모두 Y의 덕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친구 덕에 덩달아 나의 인생이 무용담이 되어간다. 더 잘난 것도 없는 내가 내게도 이런 친구가 있다며 자랑하며 살 수 있다.


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의 쟈크 레니에가 머무는 세상의 끝도 Y가 가겠다고 한다면 그곳은 이 땅의 끝이 아니며 고독의 땅이 아니다. 페루에 다시 가는 것도, 세상 어딜 가는 것, 어디든 네가 가는 곳은 도망쳐 닿은 곳이 아니라 그저 넓은 너의 땅 어딘가를 밟아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아니면 이번엔 염원하던 우유니 사막으로 가보자. 어디든 향할 마음이 있으면 길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무용담을 계속 이어가 보자. 길 끝에 내가 바라던 목적지가 없어도 디딜 마음만 있다면 무용담은 끝나지 않는 것이니 우린 더 긴 이야기를 써내려 가될 테니 말이다.




잠시 머무르고 있는 Y가 닿을 다음 땅을 기다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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