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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Apr 23. 2021

도망의 역사, 퇴고를 마치며

비로소 퇴사하였습니다

다음 국면은 어느덧 접어들어있. 희미하게 그어진 선을 넘아가고 어느 정도 걸어 들어가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둘러보는 세상은 계 없는 새로움으로 가득하다.


사의 날이 그랬다. 카네이션과 물망초 꽃을 받았다. 우리의 마지막도 아닌데, 나를 잊지 말란 꽃을 주는 상냥한 친구들이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 잠시 내려둔 사이 물망초 꽃은 솜이가 잘 씹어서 끊어놓았다. 앞으로도 보게 될 테니 잊지 말란 말은 하지 말라는 솜이의 뜻이다.

물망초가 사진에 나오지 않은 이유....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어제는 잔을 나누었다. 정수리에 뽀뽀를 하며 어떻게 보내느냔 말이 따뜻하고 고마웠다. 내가 속한 사회가 이들이 있어 이렇게나 따뜻한 곳이라면 머무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적당히 취기가 올라 집으로 돌아가는데 가 내린 결정이 맞는 걸까 확신 들지 않았다.  내가 도망치듯 떠나가는 건가 하는 의심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금기시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국토대장정이다. 20살의 나는 호기롭게 20개의 목표를 세웠는데 국토대장정에 참가하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았던 것이었으니, 소기의 성과는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참가만 했다는 것이 아주 큰 흠으로 남았다. 국토대장정에 걸맞은 신발, 의류, 장비 등을 구매하고 참가비까지 내고 나니 순식간에 나는 엄청난 투자금을 들인 국토대장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물론 모든 비용에 대한 지불은 부모님께서 해주셨다. 여린 딸이 무언갈 해보겠다 하니,  차치한 순수한 응원이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 팀에서도 막내였는데 언니, 오빠들의 예쁨을 많이 받았다. 나는 꿈이 분명한 사람으로, 나를 소개할 땐 자랑스레 말했다. 어느 학교 어느 학과를 다니고 있으며, 나는 언젠가 꼭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게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나의 자부심이었다. 한 가지의 목표만 가지고 살아온 고작 20년의 세월은 고르지 않았고, 세상은 험했는데 대학 입시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으로 나는 많은 것이 바뀔 거라 오판한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자기주장 강한 나를 두고 똑 부러진다며 많이 예뻐해 주셨다.


하지만 수백 명이 걷는 국토대장정에서 체력도 안 좋은 내가 가장 뒤에서 걷는 팀이 되어 걸었다. 가서 부딪혀보면 어떻게든 될 거란 무책임한 도전은 체력에 있어선 깜냥도 되지 않는 오기였다. 물을 많이 마시지 말란 말에 토를 달며, 목이 탄다고 길가 수돗물을 마셔댔다. 그렇게 물 중독 증세가 나타났다. 언니와 오빠들은 서슴없이 자기들 가진 물도 내어주었다. 발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이탈하지 말라고 외쳐주는 팀원들, 아마 나를 챙겨 끝까지 함께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중도에 포기했다. 그것도 출발지를 떠난 지 이틀 만에 포기 서약을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일 낮, 게다가 외진 동네. 아무도 없는 버스 터미널에 앉아 국토대장정 가방을 메고 있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포기라는 단어가 준 끝맛이었나 싶기도 하다. 먼저 집으로 가냐는 팀원들의 인사를 떠올렸다. 너무 힘들다 둘러대며 그 자리를 떠나온 불과 몇 시간 전의 나를 곱씹었다. 최선을 다하고 그만둔 것이 아니라 힘들다고 여기며 나를 속여 그만둔 덕에 반송할 곳도 없이 스스로 수치심을 선물하게 된 것이다. 애꿎은 포카리스웨트만 한참을 마셔댔다. 속이 타더니 한 병을 비우고 버스에 올라타 그곳을 벗어나니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도망의 역사는 그때부터 쓰여졌다. 도망치듯 빠져나간 길을 두고 합당한 선택이라 믿었다. 나는 야무지니까, 그러니까 곧장 한 길로 여태 잘 걸어온 것이고 내 선택은 틀린 적 없다고 여겼다. 한참을 더 그렇게 반쪽자리 인생을 택해 이길 것 같은 내기에만 참가하며 나는 여전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필연적인 패배는 피할 수 없는 외교관 후보자 시험을 준비하며 맞이하였다. 내가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겨야만 하는 시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럭저럭 잘 살아온 것 같은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패배라니. 하나의 길만 걸어온 똑 부러진 내 자부심은 일렬로 가지런히 무너졌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는데 꽤 시간이 들었다. 이기는 싸움만 줄곧 해오다 이겨야 하는 싸움에서 패배하고 나니 시작하기도 전에 간부터 봤다. 내가 무얼 잘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오래도록 입구에서 망설이며 제대로 발을 들인 것이 없었다. 인 삶이란 내 삶의 수식어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고민만 늘 많던 나는 오랜 고민 경력만큼이나 겁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퇴사를 하겠다고 결심이 선지는 좀 되었지만, 막상 퇴사를 하려니 망설여졌다. 뒤도 안 보고 떠나오던 도망의 시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남고 싶은 마음이 만든 망설임이었다. 그래서 여태껏 했던 '지금 힘든가?' 같은 일차원적인 의사결정과정과는 좀 다른 고민을 해보았다.

1. 내가 남고 싶은 마음이 든 이유는 무엇일까?

2. 내가 나가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3. 도망치는 걸까?


망설임은 눈을 가려 시간을 벌려고 하는 못된 성질이 있다. 이 시간은 여유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시간을 끌어 한 곳에 안주하게 하려 한다. 안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방향성을 잊는다. 찝찝한 채로 머무르는 하루를 살게 된다. 그리곤 언제고 다시 돌아가려두었던 고민을 끌어올려 어떤 삶을 살고자 했는지 서성이게 한다. 고민 중이란 핑계를 대면 망설임은 절로 따라온다. 그 핑계로 시간을 벌어 머물러보면 결정은 미루어지고, 남아 머무는 곳은 새로울 것 없이 편안해서 나를 발전할 수 없게 만든다. 이제는 그저 망설이다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까운 서른 살이 되었다.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지 말라고 하던데, 남을까 말까의 고민이었으니 남지 말라의 결정을 내렸다. 도망이 아니라 도전의 역사를 쓰는 첫 마음가짐이었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제는 내가 자리를 좀 잡길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기대와 성원으로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줬는지, 감사한 순간들이 많았다. 대상이라도 수상해야 할 수 있는 말인 듯 하지만, 내 인생의 어떤 적당한 주제의 에필로그라 생각한다면 지금과 가장 어울리는 소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들의 염원에 맞게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나에게 맞는 자리를 잡기 위해 다시 한번 떠나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순간의 결정이 내가 지는 게임인지 알 수 없지만, 도망의 역사에서 넘어가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떠나려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역사가 그저 쓰이고 있는 것뿐이라 생각하면 어떤 일도 괜찮을 것 같다.


도망치듯 떠날 땐 길이 정해져 있었다. 들어온 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니 달라지는 것 없이 제자리였다. 그런데 삶의 선택지 중 하나만 지워도 나는 제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니란 말에 이끌려 잠시나마 작가로 산 몇 개월의 삶이었지만, 이 시간이 나의 길었던 도망의 역사를 끝내줄 것 다. 그 삶이 너무 재밌었기 때문에 떠나올 것이 망설여지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삶이 좋은 것도 있었겠지만, 나를 좋은 사람으로 여겨주는 고마운 동료들의 덕이 컸. 그들도 분명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니, 내가 어딘가에 자리 잡아 더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일 거라 추측해본다. 그러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는 결론과 다시금 연결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걸어갈 길은 퇴사로 말미암은 새로운 시작이다. 나에겐 무수한 길이 또 펼쳐졌다.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에는 길을 잃는 법도 없습니다(파울로 코엘료, 스파이). 


앞으로도 내내 보게 되겠지만 두 번 말하면 입 아픈 귀여운 동기들, 언젠가 강연을 하면 꼭 들으러 오시겠다며 나를 특히 아껴주신 PM님, 우스갯소리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행복 빌어주신 디자이너님, 언제든 질척거려도 된다는 나의 첫 번째 사수,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눈물 글썽이며 배웅해주시던 마음 여린 선임 작가님


과분한 사랑이 나를 바로 세운다. 잘 살자, 또!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신 이전 직장 동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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