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뮤직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작은 움직임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by Yoon Park

화불단행(禍不單行)은 불행은 홀로 오지 않고 언제나 겹쳐서 온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현 미국 사회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해줄 수 있는 말이 과연 있을까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발생 이후 미국 전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와 더불어 약탈, 방화 등 폭력 행위가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데, 이번 시위는 단순히 개인의 사망에 대한 분노가 아닌 미국 사회에 깊게 뿌리 박힌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발생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있는 사회적 개혁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미니애폴리스 경찰 해체, LA 경찰 예산 삭감 등 시/주 정부에서도 개혁을 위한 목소리가 점차 나오고 있는 가운데, 미국 내 여러 기업들도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한 기금 출연, 유색 인종에 대한 고용 보장 등 여러 개혁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발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미국의 대형 음반사 중 하나인 리퍼블릭 레코드가 앞으로 어반 뮤직이라는 용어를 장르 카테고리, 직함, 부서명 등 어떤 경우에도 사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번 발표는 생각보다 파장이 컸는데, 그래미 어워즈를 주관하는 레코딩 아카데미가 리퍼블릭 레코드의 발표 이후 그래미 어워즈의 카테고리인 "베스트 어반 컨템퍼러리 앨범"과 "베스트 랩/송 퍼포먼스"를 각각 "베스트 프로그레시브 알앤비 앨범"과 "베스트 멜로딕 랩 앨범"으로 교체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소식들만 놓고 보면 "도대체 어반 뮤직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려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초대형 음반사 중 하나인 리퍼블릭 레코드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시상식을 주관하고 있는 레코딩 아카데미가 어반 뮤직이라는 용어를 퇴출시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래미 어워즈, 그리고 "비주류" 흑인 음악


사건의 발단은 지난 1월에 치러진 제62회 그래미 어워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해당 시상식에서 "베스트 랩 앨범" 트로피를 차지한 Tyler the Creator이 수상 이후 백스테이지 인터뷰에서 그래미 어워즈에 관해 다시 논란이 될 수 있는 발언을 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tyler.jpg 악동 캐릭터 덕분에 다른 사람이 섣불리 내뱉지 못할 말들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나랑 비슷하게 생긴 흑인 아티스트들이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내고도 연말 시상식에서 그저 "랩" 혹은 "어반"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걸 볼 때마다 짜증이 난다. 난 그냥 "어반"이라는 단어가 싫다 - 나에겐 그저 "어반"이라는 단어는 n-word (흑인 비하 단어)의 정치적 올바른 버전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사실 시상식 현장에서 관계자들이 다 보고 있는 와중에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 문제는 접어두고 그가 이런 발언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예전부터 그래미 어워즈는 "꽉 막힌 시상식", "보수 성향의 시상식"이라는 오명을 들으며 흑인 음악에 인색하다는 평을 받아온 시상식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시상식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그간 대중의 평가와는 다소 갈리는 수상 결과 등 그들만의 축제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지난 몇 년간 그래미 자체의 권위도 많이 떨어져 왔고 (아티스트들의 잇단 참석 거부와 시청률 하락) 여러 이슈로 끊임없이 비판을 받아온 그래미가 60회를 넘기고서야 마침내 작년부터 여성/유색 인종 위주의 투표인단 도입, 흑인 여성 아티스트 알리샤 키스의 호스트, 공연 라인업의 대대적인 변화 등 여러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Childish Gambino가 힙합 아티스트 써 그래미 역사상 처음으로 "올해의 노래" 부문을 수상한 것도 흑인 음악을 독립적인 대중음악 장르로 인정하고 더 이상 대중의 눈을 무시하지 않겠다는 제스처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래미 어워즈 내에서 랩, R&B 아티스트로써 수상을 노릴 수 있는 카테고리는 매우 한정적입니다. R&B, 랩 모두 앨범 판매, 스트리밍, 라이브 투어 산업 규모만 따져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적으로 공통점을 찾기 힘든 힙합, R&B 아티스트들이 매년 "어반 컨템퍼러리" "랩/송" 등 두리뭉실한 카테고리 내에서 경쟁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2011년까지만 해도 가스펠 앨범 카테고리는 팝/컨템퍼러리, 락/랩, 서던/컨트리/블루그래스 세 개로 나뉘어 가스펠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들이 매우 균등한 기회를 가지고 사이좋게 상을 나누어 왔습니다. 비록 그래미가 자체적으로 카테고리 정리를 하면서 이 세 개의 상은 하나의 가스펠 앨범 카테고리로 묶이긴 하였으나 그래미 내에서 R&B, 랩 음악이 받는 취급은 가스펠뿐 아니라 아메리칸 루츠, 클래식 등 다른 장르 카테고리와 비교하면 여전히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패키지 상품으로 전락한 흑인 음악


1974년 전설적인 흑인 DJ였던 프랭키 크로커가 처음 사용한 이후 "어반 컨템퍼러리"라는 용어는 R&B, 힙합, 디스코, 랩 등 흑인 음악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사실 프랭키 크로커가 이 어반 뮤직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게 된 배경도 그 당시 대중음악 취급을 받지 못하던 흑인 음악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서 흑인 음악을 좀 더 대중화해보고자 했던 것인데, 당시 유명 음반사들의 경영진은 대부분 백인이었기 때문에 흑인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던 이들에게 프랭키 크로커의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이후 어반 뮤직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장르의 흑인 음악이 한 데로 묶인 상태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었고 이는 리퍼블릭 레코드 같은 대형 음반사뿐 아니라 그래미 어워즈 같은 시상식이 흑인 음악을 정의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인 음악을 결정적으로 대중들에게 소개해줄 기회를 만들어 주었던 어반 뮤직이 이제는 하나의 올가미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 어반 뮤직이라는 개념이 최근 더 문제가 되어왔던 이유는 Tyler the Creator의 말대로 어반 뮤직이 기존의 대중 흑인 음악, 즉 R&B나 랩뿐 아니라 다양하게 장르를 넘나드는 창의적인 아티스트들 마저도 어반/컨템퍼러리라는 좁은 울타리에 가두어버리는 일이 최근 들어 너무나도 빈번해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Lil Nas X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전통 컨트리 음악의 요소를 철저히 이식한 "Old Town Road"로 전 세계적인 히트를 친 이후에도 빌보드는 "컨트리함이 부족하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컨트리 차트에서 해당 곡을 없앴고, 비슷한 이유로 2016년 Beyonce의 "Daddy Lessons"라는 곡도 컨트리 음악의 요소가 깊게 베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컨트리가 아닌 어반 뮤직으로 분류되었습니다. Kacey Musgraves 같은 수많은 백인 컨트리 뮤지션들이 최근 빠른 템포의 팝 음악 스타일을 빌려와 컨트리 음악이라고 하기도 애매모호한 곡으로 당당히 컨트리 차트에 이름을 걸고 있는 현 상황을 보면 Tyler the Creator의 어반 뮤직에 대한 일갈은 쓸데없는 화풀이가 아닌 근거 있는 일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republic-2020.jpg 이번 발표는 그냥 흘러 넘길 수도 있지만 충분히 큰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번 리퍼블릭 레코드와 그래미의 발표를 Tyler the Creator 발언 때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에야 나온 뒤늦은 대응책이라는 비판 여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물 흑인 아티스트 (The Weeknd, Drake, Post Malone 등등...) 로스터를 보유한 음반사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상식이 어반 뮤직이라는 개념에 대해 공개적인 태클은 건 점은 음악 산업이 더 정확하고 세분화된 기준을 가지고 흑인 음악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나아가 아티스트들이 본인들이 만든 음악이 단순히 어반/컨템퍼러리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것이 아닌 더 세분화된 장르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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